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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가 좋다

새로운 감각을 여는 것에서부터 시작하기

by 북드라망 2016. 12. 9.

새로운 감각을 여는 것에서부터 시작하기

 


단풍이 물들기 시작하는 10월. 남산강학원과 감이당에서는 곰댄스 마감 날짜가 코앞으로 다가오면서 여기저기 모임이 만들어지고 본격적인 글쓰기가 시작되었다. 그래서일까? 이번 녹취 중 제일 귀에 솔깃하게 들려오던 이야기들은 글쓰기에 관한 질문들이었다.

 

 

질문 1. 글을 쓰려고 문제를 생각하다 보면 굉장히 많은 생각들을 한 것 같은데 그게 뭔지를 잘 모르겠어요. 그러다 보면 나중에는 길이 없는 것 같은 생각에 빠지게 되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요?

 

 

스님: 글을 쓴다는 것은 집을 짓는 일과 똑같습니다. 그래서 설계도가 필요하죠. 그냥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라고 할 때는 그것이 방법처럼 생각 됩니다. 이때 그냥 생각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생각에 대한 설계도를 그려야 합니다. 설계도는 책을 쓸 때의 목차와도 같습니다. 그래서 먼저 내가 무엇을 생각할 것인가를 써서 설계도의 뼈대를 대충 만들어야 되죠. 책 앞에 나오는 목차처럼 생각의 목차를 정해놓고 다른 생각으로 갔다가도 다시 목차를 보고 돌아오고 또 다른 생각으로 갔다가도 다시 목차로 돌아오면서 생각을 풍부하게 만들어 내야 되는 겁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글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아주 독특한 특징이면서 글에 논리체계로 사람을 빨아드리는 힘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가 보통 ‘이야기를 잘 한다’라는 말은 이야기를 풍부하게 잘한다는 말도 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글의 의미 속에 내가 빠져 있다’라는 말도 됩니다.


 이 ‘글의 의미’를 새롭게 창조하는 사람들이 철학자들이에요. 그런데 잘 외우는(흉내 내는) 것은 ‘글의 의미’ 속에 빠져든 것과 똑같은 거죠. 기본적으로 기본 팩트를 배우기 위해서 공부하는 것이지, 그 팩트 속에 들어가기 위해서 공부하는 것은 아니거든요. 즉, 인문학이라는 것은 그 팩트를 통해서 스스로 새롭게 ‘글의 의미’를 바꿔 낼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겁니다. 그래야 ‘글의 의미’ 밖으로 자기가 나와 새롭게 길을 모색해 가며 자신의 독자적인 삶을 사는 거죠. 지금 생각이 왔다 갔다 한다는 것은 글의 의미 밖으로 나가 있다는 말입니다. 이러면서 생각이 풍부해 지겠죠. 그런데 이때 설계도 없이 그냥 생각만 왔다 갔다 하다보면 뭔가 독특하기는 하지만 사람들이 동의할 수 없는 글이 되는 거죠. 그래서 ‘글의 의미’를 새롭게 만들어 내는 것, 그리고 그 의미를 잘 일관성 있게 설명해 내기 위해서는 골절(설계도)을 잘 세워야 합니다.  

 

질문자: 그런데  뼈대(설계도) 자체가 잘 안 짜지는 경우에는 어떻게 하나요?

 

스님: 기본기가 부족하면 뼈대를 짤 수가 없습니다. 기본 사실에 대한 적립된 지식이 충분하지 않으면 하나의 개체가 있어서 쓰고 나면 나중에는 쓸 것이 없어요. 그래서 많은 독서량을 필요로 합니다. 뼈대를 짠다는 말은 뼈대로 쓸 수 있는 자료가 풍부해야 한다는 거죠. 이 자료는 독서와 생각, 이 두 가지의 상호 학습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때문에 어느 정도 시간을 드리고 풍부한 재료를 창고에 쌓아 놓아야 되는 거죠. 그렇지 않으면 한번 쓰고 나면 다시 쓸 내용이 없어지게 됩니다.

 

 

질문 2. 저는 목소리 톤도 높고 말도 굉장히 장황합니다. 그건 저의 생각을 상대한테 잘 전달하고 싶은 마음이 커서인 것 같은데 어떻게 하면 장황하지 않고 제 생각을 상대에게 잘 전달할 수 있을까요?

 

 

스님: 말과 글은 가장 중요한 대목이 시작할 때와 끝날 때라고 합니다. 시작할 때 강한 임팩트를 줘서 사람이 주위를 잠깐 충분히 기울였을 때 자기가 하고 싶은 요지를 완벽하게 정리해서 말하고 그 다음부터는 이런저런 말들을 하다가 마지막에 뭔가 강조되는 말로 마무리하는 것이 말도 잘하고 좋은 글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자기하고 싶은 이야기가 중간에 들어가면 장황한 기운이 들어가서 상대에게 전달이 잘 되지 않습니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잘 정리해서 2-3분 안에 딱 말하고 그 다음에는 이런저런 이야기로 서로 이야기를 나누다가 마지막에 임팩트 있는 말로 마무리 하는 습관을 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습관은 그냥 말로하면 잘 되지가 않아요. 왜냐하면 이미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끄집어내 장황한 설명과 함께 말하는 습관이 되어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노트에 써서 이 말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1-2분 안에 할 것인가 라고 하는 글이나 생각을 정리하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장황해서 말은 많은데 ‘도대체 당신 말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라는 상황이 됩니다. 한마디로 핵심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먼저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을 아주 강력하면서도 재미와 수사가 있는 말들을 글로 써서 1-2분 안에 확실히 전달하는 연습을 하면서 핵심을 길러야 합니다.

 

질문자: 말이 장황한 것도 뭔가 생각이 자꾸 퍼지는 것 같은데 이렇게 퍼지는 생각을 하나로 모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스님:  생각을 쉬게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멍 때리기를 하는 것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가만히 앉아서 그냥 자기 몸과 마음이 ‘멍’하니 흘러가고 있는 것을 보고 있으면 되요. 그러면 이때 기존에 생각을 열고 있는 도로들이 작용을 안 하게 됩니다. 작용을 안 하면 숨어있던 도로들이 수면 위로 올라오거나 다른 통로들이 형성됩니다. 이때 세상을 다른 식으로 볼 수 있는 경험을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자기 삶의 내용 중에서 다양한 경험들이 있고 이 다양한 경험들을 하나로 꿰뚫는 것. 내 몸과 마음에 있는 다양성들을 경험하고 그 경험을 나의 삶의 하나로 꿰뚫어 내는 것이 통찰력입니다. 이 통찰력을 가지고 여러 사람들과 잘 관계를 맺는 것을 지혜라고 합니다. 


그런데 통찰력을 얻으려면 내부적으로 다른 감각을 열어 삶에서 다른 경험이 일어나야 하는 거죠. 그래서 ‘멍 때리기’ 거나 ‘화두’에(화두란 멍 때리기가 아닌 단일한 대상에 의식을 집중시키는 것) 집중하게 되면 언어를 통해서 세상을 해석하는 뇌 부위가 작용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니까 다른 부위는 깨어 있는데 언어 분별을 통해서 사건을 이야기하는 부위는 쉬게 되는 거죠. 지금까지 우리는 언어를 통해서 세상을 보는 이야기를 계속 해왔습니다. 그런데 그것(언어) 아니 세상의 경험들, 예를 들면 동물에 감각 면이나 식물의 삶 등등이 우리 안에 많이 남아 있는데 그런 부분들이 언어에 갇혀 거의 나오지 않게 되었죠. 그러니까 언어통로가 작용할 수 있는 길이 쉬게 되는 것, 그것을 우리는 마음 쉼이라고 합니다. 언어를 최종적으로 받아 인지하려면 매일 여러 부분들이 협력을 해야 하는데 그 협력 층도 쉬게 되면서 훨씬 더 근원적인 생명활동을 하고 있는 부분들의 연결 통로에서 다른 의미들이 떠오르게 됩니다. 그래서 삶이라고 하는 것은 다양한 감각과 경험들이 내 몸에서 일어나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로 만들어 다른 식으로 보는 것이 통찰이에요. 


이런 통찰이 없으면 계속해서 내가 가지고 있는 정보로 보게 되는데 그 정보가 틀린 것은 아니지만 100% 사건을 해석해 내지는 못합니다. 변이가 없이 창조적 적응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우리의 40억년의 생명 역사에서도 끊임없이 변이를 거듭하고 있죠. 멍 때리고 있거나 화두에 집중하면 언어통로가 쉬게 되는 것은 인간에게 있어서 언어통로가 제일 늦게 만들어졌기 때문인데 이때 내부에서 새로운 감각지각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멍하고 있으면 기존의 중점적 지각부분은 쉬고 다른 것이 나타나는 체험을 하게 되면서 이런 체험을 통해 지각이란 무엇인가라는 것을 꿰뚫어서 이야기 할 수 있는 경험을 쌓게 되는 거죠.


이때 조심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경험은 새롭게 했는데 해석은 답습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게 답습을 하는 것을 특히 선종에서는 완전히 노예적 삶을 사는 것과 똑같다고 라고 말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간접적 통찰력은 아까 말한 대로 다양한 독서에서 나옵니다. 독서를 많이 하게 되면 각기 사람들마다 뭔가 다른 이야기를 듣게 되는 거죠. 그러면서 다양한 부분이 계속 쌓여 어느 정도 일정한 양이 되면 이것이 화학반응이 일으켜 이제 자기 내부적으로 뭔가가 튀어나오게 됩니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은 독서나 다른 사람들의 경험과 점차적인 학습을 통해 삶을 보는 통찰력을 길러 왔습니다. 어떤 사람 말에 의하면 그 독서량이 천 권 내지 삼천 권이라고 하더라고요.


 글을 잘 쓰고 말을 잘하는 것은 통찰력에서 나오는 것이다. 통찰력이란, 자기 삶(마음과 몸)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경험들과 다양한 감각들을 나의 삶의(나의 언어로) 하나로 꿰뚫어 내는 것이다. 통찰력을 기르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 내재적 통찰력은 ‘멍 때리기’나 ‘화두’에 집중하게 되면 언어 영역이 쉬는데 이때 다른 영역(감각)이 작용(열리게)하게 되면서 얻게 되는 새로운 경험을 나만의 언어로 이야기 할 수 있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 이때 주의해야 할 점은 그 경험을 해석할 때 답습하지 않는 것이다. 두 번째, 간접적 통찰력은 다양한 독서에서 나온다. 그 다양한 독서의 양은 천 권에서 삼천 권 정도라고 한다.

 


무엇이든 잘하려면 훈련이 필요하다. 글쓰기 또한 한 번에 훌쩍 뛰어오를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차근차근 하나하나 경험하고 느끼면서 그것을 나의 말로 이야기해야 한다는 스님의 말씀을 정리하면서 매번 한 번에 많은 것을 얻으려는 나의 욕심을 다시 한 번 깨닫는 시간이었다. 


정리_능금(能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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