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지난 연재 ▽/약선생의 도서관

『중론』- 모든 것이 무너지는 자리에서 생각하기

by 북드라망 2016. 11. 22.

모든 것이 무너지는 자리에서 생각하기

용수의 『중론』




늦은 오후 소파에 널브러져 ‘생각한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본다. 일반적으로 ‘생각한다’고 하면, 무언가를 머릿속에 떠올리며 연쇄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상상한다. 그것은 사유를 곧 재현(再現)으로 상상하는 것이다. 이 개념에는 어떤 객관적이고 현재적인 외부 세계가 이미 있고, 사유는 그 세계에 대한 그림 혹은 사본이라는 가정이 숨어 있다. 그러나 그런 틀이라면 사유가 세계를 바꾸는 일은 절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보나마나 그것은 자기 자신조차 변형시킬 수 없을 것이 틀림없다. 그래서 대개는 이렇게 반문한다. “생각한다고 세상이 바뀌나?” 이런 따위의 사유는 그저 고정된 세계의 반영일 뿐 전혀 세상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임을 반문하는 자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이 경우 사유는 인식의 정밀성이나 정확함의 정도에 따라서만 평가되는 알량한 정신이다. 이런 식이면 잘 생각한다고 세상이 바뀔 턱이 없다. 


질 들뢰즈, "사물들을 변할 수 없는 현전(現前, presence)으로 보고, 또한 보이는 그 세계가 전부"


들뢰즈는 이런 사유를 ‘독단적인 혹은 교조적 이미지’[각주:1]라고 하고, 그런 이미지를 충실히 받아들이는 생각들을 격렬하게 비판한다. 재현적 사유는 차별화 된 세계를 그저 충실하게 보여줄 뿐이기 때문에 새로운 차이를 일체 허용하지 않는다. 오로지 하나의 변하지 않는 세계만을 인정할 뿐이다. 즉 다른 세상을 꿈꾸지 못하게 한다. 그래서 독단적이고 교조적이다. 이런 생각은 마치 세계를 이미 의미 있고 논리적으로 질서 지어진 양 다룬다. 즉 사물들을 변할 수 없는 현전(現前, presence)으로 보고, 또한 보이는 그 세계가 전부라고 이해한다. 


이런 이해 아래에서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차이’도 문제가 된다. 이미 주어진 세계에서 식별되는 차이는 이미 굳건히 서 있는 세계 내에서 사물들을 분류하고 분별하는 것에 불과하여 존재의 동일성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세계는 그대로인 채로 그 안에서 식별할 뿐이다. 그런 차이는 일종의 무늬에 불과하다. 사전에 규정된 차이는 동일성의 세계에서 한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한다. 


우리는 이상한 습관에 사로잡혀 있다. 뭔가 진정한 차이를 사유하려고 할 때면, 우리는 언제나 그것에 라벨을 붙여서 고정시키고, 그 고정시킨 것들을 묶어 변하지 않는 세계로 동일화한다. 다시 상식과 재현에 종속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전에 주어진 차이 안으로 다시 되돌아가고 만다. 그런 사고 패턴이 반복되고 강화됨으로써 어느 순간 고정된 세계를 당연한 것으로 인정하고, 종속된 차이들(이것은 그저 주어진 분별에 불과하다)을 차이의 모든 것 인양 느끼게 되어, 더 이상의 진전을 스스로 가로막는다. 


대승불교의 핵심 경전인 『중론』[각주:2]은 이런 문제에 대해서 정면으로 다룬다. 용수는 들뢰즈가 말한 “사유의 독단적 이미지”를 끊임없이 비판한다. 다음은 용수(龍樹)의 게송이다.


모든 법은 스스로 생겨나는 것도 아니며

다른 것으로부터 생겨나는 것도 아니다.

스스로와 다른 것이 합쳐진 데서

생겨나는 것도 아니며

아무런 원인 없이 생겨나는 것도 아니다.

이런 까닭에 생겨남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諸法不自生 亦不從他生 不共不無因 是故知無生)[각주:3]

 

불교에서 ‘인연(因緣)’은 대단히 중대한 주제다. 인연은 말 그대로 무엇이 생겨나는 원인을 말한다. 원인들이 얽히고설켜서 사건들을 만들어낸다고 할 때, 그 원인들의 집합이 바로 인연이다. 용수에 따르면 독단적 사유는 인연을 하나로 고정된 법칙으로 인식함으로써 생겨난다. 어떤 원인들의 집합을 진리로 떠받들고, 이것을 재현하는 것으로 사유를 대체할 때 사유는 독단과 교조가 된다. 


이런 인연이 생겨나는 경우는 네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스스로 생겨나거나, 다른 것으로부터 생겨나거나, 스스로와 다른 것이 합작해서 생겨나거나, 원인이 될 만한 어떤 개연성도 없는 데서 불쑥 생겨나는 경우이다. 그러나 용수는 ‘모든 법은 생겨나지 않는다.’라고 결론짓고 있다. 스스로도, 다른 것으로부터도, 서로 합작해서도 생겨나지 않으며, 더군다나 아무 이유 없이 불쑥 생겨나지도 않는다고 단언한다. 결국 네 가지 경우 모두를 부정하기 때문에 법 자체도 생성되지 않는다. 결국 ‘원인들의 집합’ 자체가 생성되지 않으므로 고정적인 원인들도 당연히 존재하지 않는다는 시각이 가능하다. 


이런 생각은 ‘운동’을 말할 때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흔히들 운동은 실체론적이지 않은 듯이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용수는 다르다. 예컨대 ‘간다’라고 할 때, 우리는 ‘아직 안 간 것’(未去)과 ‘이미 간 것’(已去)를 상정하고 그 사이에 ‘가고 있는 현재’(去時)가 있는 듯이 여기고 상상한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현재는 과거도 미래도 아닌 ‘지금 이 순간’을 말하고 있는 것인데, 그 순간의 꼭짓점에서 바라보는 현재는 정지된 상태일 것이다. 현재를 콕 집어 이야기해야 한다면 그럴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그 순간의 운동이라는 것은 형용모순이고, 따라서 가고 있다는 사실도 거짓이 되고 만다. 운동이라는 개념적 자성(自性)이 결국 성립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운동이란 없다! “‘이미 간 것’에는 ‘감’이 없다. ‘아직 안 간 것’에도 ‘감’이 없다. 이 두 경우를 떠나 ‘가고 있는 현재’도 ‘감’이 없다(已去無有法, 未去亦無法 離已去未法 去時亦無法)”[각주:4]


불교에서 ‘인연(因緣)’은 대단히 중대한 주제다. 인연은 말 그대로 무엇이 생겨나는 원인을 말한다.


이 부분은 「인과에 대한 관찰」(觀因果品)에서 더욱 곤혹스럽게 파고든다.


현재의 원인을 말한다 해도 그 원인은

현재의 (결)과와

미래의 (결)과 그리고 과거의 (결)과와

결코 만나지 않는다.

(若言現在因 而於現在果 去來過去果 是則終不合)[각주:5]


앞서 용수는 인연의 잘못된 개념설정을 지적하고 ‘인연은 없다’고 선언했었다. 이제 「관인연품」에 와서 용수는 여러 인연이 스스로 자성을 가지고 결과에 앞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면 결과를 발생시키는 원인이라고 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원인이라고 말하는 어떤 것도 현재의 결과를 말해줄 수 없다는 것이다. 어떤 원인 A를 생각한다고 하자. 그러면 다시 그 원인을 발생시키는 다른 원인 B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무한히 소급하게 되는 문제에 봉착한다. 이때 ‘누군가’는 이런 문제를 참지 못하고 무한 소급을 단절하여 “최초의 원인”이라는 가상으로 미끄러진다. 그 순간 세계가 고정된 이미지가 되고 마는 것이다. 


이때 무한 소급을 단절시키는 자가 곧 주체인 ‘나’다. 어떤 흐름에 따라 무한히 바뀌어 나가는 장이, ‘나’에 의해서 단절이 되어 과거와 미래를 기억하고 추상하면서 ‘나’가 그 흐름 밖에 있는 것 같이 여겨지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원인과 결과의 얽힘을 잘 이해해야 한다. 사실은 용수에게도 원인과 결과라는 얽힘의 관계가 부정되지는 않지만[각주:6] 변화하여 무상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서로 다른 것이 되므로 고정된 원인과 결과라는 자성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얽힘도 굉장히 다양하게 변한다. 그래서 용수는 극단에 서서 과거의 원인이 현재나 미래의 결과와 결코 만나지 않는다고 단언하기까지 하는 것이다. 그러나 흐름 속에서 어떤 주체가 사후적으로 나타나서 흐름을 단절시키고 원인과 결과를 고정시켜서 사고를 독단적으로 만든다. 


이렇게 고정된 인연의 입장(주체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은 어떤 위계적 질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니까, 인연을 머리로는 알지만, 실제로는 불교의 핵심을 잘못 알게 되는 것이다. 여전히 고정된 원인들의 집합에 자성을 부여하고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전혀 차이를 만들어 내지 못하는 인연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근대 서구 사유에서도 차이는 사유사의 양대 산맥인 헤겔이나 구조주의에서도 강조했던 개념이긴 하다. 그러나 그들은 차이를 우선적인 것으로 간주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주체에 정초되어 있었다. 물론 구조주의가 ‘인간’을 ‘언어’, ‘문화’ 등으로 전환했다고 해도, 그것조차 여전히 주체주의(subjectivism)의 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차이가 여전히 고정된 주체에 기원하기 때문이다. 용수의 공사상에 비추어 묻는다면, 그것들에게 이렇게 물어야 한다. “원인의 모습이 없다면 결과를 있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若無有因相 誰能有是果)[각주:7] 

 구조주의조차 원인의 모습을 구성하여 그곳에 안착하려고 했다. 


들뢰즈는 이런 문제를 ‘내재면(plane of immanence)’이라는 개념으로 돌파한다. 그것은 어떤 사물이나 존재로 환원되는 그런 것이 아니라, 역동적이고 열린 생성의 흐름이다. 그 흐름 속에서는 원인과 결과가 끊임없이 자리바꿈을 하면서 매순간 새로운 생성이 이루어진다. 그러다보니 그것은 ‘현실적’이라기보다, ‘잠재적’이다. 과거도 미래도 결정되어지지 않은, 그래서 현재도 매번 바뀌는 그런 면. 그래서 그것들은 원인들의 집합이 아니라 생성의 잠재적 포텐셜(virtual potential)들이다. 그곳에서는 미분화되어 아직 목적이 생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어느 무엇도 원인이나 결과로 말할 수 없다. 결국 그것들은 어떤 정형화되고 지각된 단위에서도 벗어나 있다. 용수가 비판했던 원인과 결과는 이런 단위를 말한다. 용수가 비판했던 것들은 이미 현실화되어 화석화된 원인과 결과다. 그것은 사후적으로 껍데기로 떨어지는 주체에 의해 소급된 원인과 결과일 뿐 인거다.


그렇다면 진정으로 사유한다는 것은 이미 주어진 세계 내에서 구별되는 항들 사이의 차이를 분별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바탕도 갖지 않고 한정되지 않은 차이생성의 과정으로서 생각하는 것이다. 인간도, 언어도, 문화도 전혀 사유의 근거가 될 수 없다. 용수는 근거 없이 사유하는 것, 이것을 고투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사유가 지금 보고 있는 것들과 무관한 다른 어떤 것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사실 모든 현실적인 것은 모든 잠재적인 것이 통과하는 중에 생겨난 잠정적인 모습이다. 그러므로 잠재적인 것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라도, 현실적인 것에서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시 말하면 현실적인 것은 잠재적인 것으로 들어가는 도관(導管, pipe)이다. 


잠재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 사이

그러므로 현실적인 것조차 잠재적인 것이다. 잠재적인 것들이 생성 중에 잠시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점이 될 때 현실적인 것으로 잠시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우리의 ‘주체’는 그 잠시 동안 안정적인 점들을 분별하고 있을 뿐이다. 현실적인 것들은 안정성이 훼손되면 언제든 사라질 운명에 처해있다. 그렇지만 그런 점들 속에서라야 또한 잠재적인 것들 속으로 들어가 ‘내재면’에 도달하게 된다. 단지 필요한 것은 일체의 선입관을 배제하고 그것을 바라보는 눈이다. 그래서 용수가 말한다. “모든 법이 공하기 때문에 세간은 항상하다는 따위의 견해를 어느 곳, 어느 때에 제기하겠는가?”[각주:8]


그것은 들뢰즈가 예견한 바, 철학이 참된 시작을 발견하는 장소는 독단적 이미지와 치열한 싸움을 벌이는 곳이다. 어쩌면 이런 싸움은 ‘비-철학’이라는 비난도 듣게 될 것이다. 그만큼 여기서 치러야 할 대가는 크다.[각주:9] 모든 것이 무너지는 곳이므로. 

     

글_약선생(a.k.a. 강민혁)




  1. 질 들뢰즈, 『차이와 반복』, 김상환 옮김, 민음사, 2004, 294~295쪽 [본문으로]
  2. 『중론』의 중관사상이 말하는 ‘중관(中觀)’이란 문자 그대로 ‘올바른 견해’로서 ‘중’(中, madhya)과 ‘중도’(madhyamā pratipat)에 대한 관찰을 의미한다. 무엇과 무엇의 중인가? 그것은 비유비무(非有非無)로서의 중이다. 그리고 ‘관’(觀)은 마음을 밝힌다는 뜻이다. ‘중관’에 대응하는 인도어도 ‘마디야마카’(Madhyamaka)인데, 이것은 ‘중’ 혹은 ‘중도’를 의미하는 ‘마디야(madhya)’와 사람 혹은 논서를 의미하는 접미사 ‘카(ka)’가 결합된 말이다. 결국 중도을 설하는 논서, 중도를 주장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즉 비유비무를 주장하는 논서나 사람인 것이다. 『중론』은 일체의 법에 대해서 ‘중’을 논하는 책이다. [본문으로]
  3. 용수 지음, 『중론(中論)』, 정화 풀어씀, 도서출판 법공양, 2007, 43쪽. [본문으로]
  4. 같은책, 63쪽 [본문으로]
  5. 같은책, 434쪽 [본문으로]
  6. 「관인연품」의 마지막에 “결과는 여러 인연이 만나서 생겨난 것도 아니고 만남이 없이 생겨난 것도 아니다”라고 말한다. 결국 사건은 인연이 없이 생겨나지도 않고, 그렇다고 인연이 있다도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용수 지음, 『중론(中論)』, 정화 풀어씀, 도서출판 법공양, 2007, 439쪽.] [본문으로]
  7. 같은책, 438쪽 [본문으로]
  8. 一切法空故 世間常等見 何處於何時 誰起時諸見 [용수 지음, 『중론(中論)』, 정화 풀어씀, 도서출판 법공양, 2007, 623쪽.] [본문으로]
  9. 질 들뢰즈, 『차이와 반복』, 김상환 옮김, 민음사, 2004, 295~296쪽. [본문으로]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