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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나의 고전분투기

공자의 정치학① - 군주제의 민주화

by 북드라망 2016. 11. 17.

공자의 정치학① - 군주제의 민주화 


 

유가(儒家)의 정치철학을 한마디로 집약한다면, “修身,齊家.治國,平天下(수신제가치국평천하)”일 것이다. 『대학』에 나오는 이 언명은 개인의 금욕적 수양을 통해 정치적 성공을 이룰 수 있다고 읽힌다. “성악설”을 주장한 것으로 알려진 순자는 이러한 유가의 정치철학에 대해 “품성을 도야하는 방법은 들었지만, 국가를 통치하는 방법은 들은 일이 없다”[각주:1]고 했다. 개인의 인격도야와 국정은 별개의 문제이니 공자에게는 정치철학이 없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작금의 믿을 수 없는 정치스캔들을 생각한다면, 지도자의 높은 도덕성은 확실히 중요한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훌륭한 인격을 갖춘 사람을 최고주권자로 뽑았다고 만사형통이 될까? 아마도 단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를 날카롭게 지적한 사람은 스피노자다. 스피노자는 『정치론』을 남겼는데, 「군주정의 제도적 기초」편에서 이렇게 말했다. 


“어떤 인간도 잠을 한숨도 안자고 분별력이 지속될 수는 없으며, 매우 강하고 정직한 성격의 소유자라도, 때로는, 특히 가장 정신력을 필요로 할 때 좌절하거나 패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누구라도 자기 자신에게 바랄 수 없는 일, 예를 들어 자기의 이익보다 남의 이익을 살피라고 한다거나, 탐욕과 시기, 야심으로부터 벗어나라고, 특히 그 사람이 일상적으로 감정의 가장 강렬한 유혹에 놓여있을 때, 그렇게 하라고 주문하는 것은 확실히 어리석은 짓이다.”(베네딕트 데 스피노자, 『정치론』 6장, 3절) 


스피노자는 순자처럼 인격도야와 정치가 별개의 문제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한 순간의 흐트러짐도 없이 분별력을 유지하기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인격도야가 개인의 자율적 행위라면, 그것은 타동적인 원인에 의해 맥없이 무너지고 만다. 몸이 아파서 일시적으로 정신이 미약해질 수도 있고, 강렬한 정념에 휘둘릴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한 사람의 일관된 분별력과 선의에 공공의 안녕과 복리를 기댄다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스피노자는 “모든 권력을 한사람의 손에 넘기면 평화보다는 예속이 촉진 된다”(같은 책, 6장 4절)고 경고하고 있다. 


공자도 스피노자와 마찬가지로 사람의 덕성이 항구적으로 유지될 수 있다고 보지 않았다. 사람들의 어리석음에 대해 “사람들은 모두 자신은 지혜롭다고 말하지만(人皆曰予知), 그물이나 함정에 몰아넣어도 피할 줄을 모른다(驅而納諸罟擭陷阱之中而莫之知辟也) 사람들은 모두 자신은 지혜롭다고 말하지만(人皆曰予知), 중용을 행하겠다고 하면서도 한 달도 지켜내지 못한다(擇乎中庸而不能期月守也)”고 탄식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천하와 나라를 평안히 잘 다스릴 수도 있다. (天下國家 可均也) 높은 벼슬을 사양할 수도 있다. (爵祿 可辭也) 심지어 시퍼런 칼날을 밟을 수도 있다. (白刃 可蹈也) 그러나 중용은 불가능하다. (中庸 不可能也)”고 까지 말한바 있다.   


하지만 유가의 정치철학이 개인의 인격도야를 통한 정치의 완성을 주장하는 것도 사실이다. 높은 인격을 가진 자가 군주나 지배계급이라면 아마도 좋은 정치를 펼 것이다. 하지만 공자가 한탄했듯이 인간은 걸핏하면 반중용(反中庸)에 빠진다. 오히려 군주는 인격도야에 힘쓰기가 더 어려운 조건이라는 편이 맞을 것이다. 이런 허약한 토대로부터 치국과 평천하를 기대한다는 것은 차라리 도박에 가깝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거의 아포리아로 보이는 이 문제에 대해 공자는 어떻게 답하고 있는 것일까? 이 글에서 나는 이 문제에 대한 공자의 답을 찾아보려고 한다. 중용 20장은 공자의 정치론이다.  




노나라 애공이 정치에 대해 물었다. 

哀公 問政


공자가 말씀하시기를, 주나라의 문왕과 무왕이 행한 정치가 목간과 죽간에 남아있습니다. 그러한 정치를 행할 사람들이 있으면, 문왕과 무왕의 정치가 행해질 것입니다. 그럴만한 사람들이 없으면 그 정치는 행해지지 않습니다. 

子曰 文武之政 布在方策 其人存則其政擧 其人亡則其政息


사람의 도리는 정치에 빠르게 나타나고 땅의 도리는 나무에 빠르게 나타납니다. 정치의 효과는 부들과 갈대가 자라는 것처럼 빠르게 나타납니다.”  

人道敏政 地道敏樹 夫政也者 蒲蘆也 


공자는 500년전 주나라를 건국한 문왕과 무왕의 정치를 거론한다. 공자가 모범으로 삼는 정치는 문/무의 정치이고 그들의 정치는 죽간에 모두 기록되어 있다. 말하자면 “what"의 문제는 고민거리가 아니라는 말이다. 이 대답을 듣는 애공은 답답했을 것이다. 문왕은 천하의 2/3을 장악하고 있었고 무왕은 천하를 모두 자기에게 복속시켰던 대단한 왕들 아닌가? 지금 애공 자신의 처지는 그것과 판이하게 다르다. 당시의 노나라는 삼환(三桓)이 정사를 좌지우지하는 과두제에 가까운 정국이었다. 그런데 한가롭게 문왕과 무왕의 정치라니. 그러나 공자는 “其人存則其政擧(기인존즉기정거),” 그러한 정치를 행할만한 사람(人), 즉 신하가 있었기에 그런 정치를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문왕과 무왕이 그런 정치를 펼 수 있었던 것은 무력이 강했기 때문이 아니라 신하를 가졌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셈이다. 따라서 지금 애공이 난국에 빠진 것은 그만한 무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신하가 없어서라는 말과 같다. 


이 문장을 유능한 인재를 발탁해야 한다는 의미로 읽을 수도 있겠지만, 그럴 경우 해명되지 않는 문제들이 있는 것 같다. 대개 국정을 하는데 유능한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좋은 정책을 입안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공자는 그런 정책은 이미 문왕과 무왕이 다 만들었기 때문에 죽간을 들춰보기만 하면 된다고 이야기 하고 있으니 정책의 실행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더욱 이상하다. 정책의 실행이야 군주가 명령을 내리면 되는 것 아닌가? 그런데도 공자가 “其人亡則其政息(기인망즉기정식), 그럴만한 사람이 없으면 그 정치는 행해지지 않습니다“라고 한 까닭은 상명하복의 군신관계로는 좋은 정치가 행해질 수 없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결국 군주 혼자서 결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공자는 유능한 인재발탁을 넘어서, 군주 1인 권력의 위험함을 경고하고 있는 셈이다.


스피노자는 『정치론』에서 군주 1인에게 국가의 권력이 전적으로 위임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다. 군주의 힘이 아무리 강력하더라도, 한 사람의 힘이 그 모든 일을 다 감당할 수는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우리가 완벽하게 군주정이라 믿고 있는 국가의 군주도 사실은 몇 사람의 측근들에게 자신의 권력을 위임하고 있었지만 은폐되었을 뿐이라고 지적했다. 진나라 시황제의 경우, 환관 조고와 승상 이사가 이와 같이 은폐된 권력이었다. 그런데 이런 은폐된 권력의 결말은 대개 파국으로 끝난다. 은폐된 권력의 전횡을 막을 장치가 없기 때문이다. 시황제의 통일제국 진나라는 겨우 20년 남짓의 최 단기 국가였다. 1인 권력의 비선권력은 군주 1인 권력과 같은 몸통의 다른 얼굴일 뿐이기 때문이다. 



유가(儒家)의 정치철학은 군주 1인의 권력집중에 대해 대단한 경계를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한 경계는 당연히 공자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래서 공자는 정치의 주체를 군주에서 신하로 옮겨 놓는다. 공자가 말하는 최상의 정치는 천자문에 나오는 구절인 “坐朝問道(좌조문도) 垂拱平章(수공평장)”이다. 이 구절은 공자가 썼다고 알려진 주역 계사전(繫辭傳)의 “黃帝堯舜(황제요순) 垂衣裳而天下治(수의상이천하치), 황제, 요, 순 임금이 옷을 드리우고 천하를 다스린다”에서 유래된 말이다. 천자문의 “坐朝問道(좌조문도)”는 군주가 조정에 앉아서 현신(賢臣)들에게 나라 다스리는 방법을 묻는다는 뜻이고 “垂拱平章(수공평장)”은 왕이 의복을 드리우고 두 손을 소매에 마주 꽂고 가만히 앉아 있어도 태평성대를 이룬다는 뜻이다. 왕이 정치의 주체라면 옷을 드리우고 두 손을 마주 꽂고 가만히 앉아 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 공자가 “其人存則其政擧(기인존즉기정거)”를 말한 것은 결국 정치의 주체를 신하로 바꾸라는 말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군주더러 허수아비가 되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정치를 하는 것은 신하를 얻는데 달려 있고, 신하를 얻는 것은 군주가 수신하는데 달려 있으며, 수신은 도(道)로써 하고, 도(道)를 지키는 것은 인(仁)을 통해서 합니다.

(故爲政在人 取人以身 修身以道 修道以仁)


한때 배신의 정치라는 말이 회자된 적이 있었다. 권력자가 힘이 떨어지기 시작하면 주변에 모여들었던 사람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거나 오히려 역공을 감행하는 것에 대한 분노의 표현이다. 어떤 정치인은 그런 경험을 통해서 사람을 믿지 못하게 되었다고도 한다. 그러나 공자라면 그 정치인의 곁에는 원래부터 아무도 없었다고 할 것이다. 누구도 탓할 것이 못된다고 말이다. 주변사람들을 힘으로 굴복시켰기 때문에 힘이 떨어지면 더 이상 굴복 시킬 수 없는 것은 자명한 이치다. 이 문장은 군주에게 수신을 요구되는 이유는 은 분별력 있는 명령을 내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신하를 얻기 위해서라고 말하고 있다.  


인(仁)은 사람이 행하는 것입니다. 혈육들과 가깝게 지내는 것이 근본입니다. (仁者人也 親親爲大) 의(義)는 마땅한 것입니다. 어진이를 존경하는 것을 근본으로 합니다. (義者宜也 尊賢爲大 ) 친척도 가까운 친척과 먼 친척이 있고, 존경하는 것에도 차등이 있습니다. 예(禮)는 거기에서부터 생기는 것입니다. (禮所生也)


공자는 피붙이를 가깝게 여기는 親親(친친)에서 仁(인)의 근본을 찾는다. 피붙이에게 끌리는 것은 생물학적인 자연법칙이다. 공자는 이 당연한 것을 仁(인)의 근본이라고 하고 그것에서 義(의)로 나아간다. 공자는 義(의)를 마땅하다는 의미의 宜(의)라고 했다. 宜(의)는 선을 행하는 자를 보면 닮고 싶고 좋아하게 되는 마음은 자연스런 마음이고, 그 마음이 근본은 尊賢(존현)이다. 공자는 仁(인)과 義(의)를 말한 다음 禮(예)를 말했다. 禮(예)에 대한 우리의 통념은 형식이지만 공자는 禮(예)의 자연스러움에 대해 말하고 있다. 피붙이라고 모두 동등하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혈연의 거리에 따라 사랑하는 것이 다르고. 尊賢(존현) 또한 똑같이 존경하는 것이 아니다. 이렇듯 사랑과 존경에도 자연스럽게 차등이 있고, 바로 여기서 禮(예)가 생겼다는 것이다. 그러니 禮(예)를 따르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런 것이고, 禮(예)를 기반으로 공적인 위계시스템이 이루어졌다는 설명이다. 여기서 군주의 역할이란 禮(예)의 정점이다. 힘으로 굴복시킨 최고의 자리가 아니라, 최고로 존경 받는 위치가 군주의 자리다. 이 말을 바꾸어 하면 최고로 존경받는 자가 아니라면 군주의 자격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군자는 수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故君子 不可以不修身 

수신을 생각한다면 부모친척을 잘 섬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思修身 不可以不事親

부모를 잘 섬길 것을 생각한다면, 사람을 알지 않을 수 없습니다.

思事親 不可以不知人

사람을 알고자 생각한다면 하늘을 알지 않을 수 없습니다.

思知人 不可以不知天


이 문장이 모두 “不可以不OO”, “OO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로 끝나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은 필연적인 조건을 말하는 것이지, 선택의 여지가 있는 것이 아니다. 공자는 군주에게 修身(수신)과 事親(사친)를 하기 위해서도, 사람을 알아야 하고, 하늘을 알아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이 말을 군주의 정치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정치를 하려면 사람과 하늘을 알아야 하는데, 그것은 修身(수신)과 事親(사친)을 통해서 체득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공자는 군주에게 “군자는 수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했는데, 군주가 수신하지 않는다면 그는 사람을 모르고 하늘을 모르는 것이다. 하늘의 작용은 어떤 것인가? 중용17장에서 하늘의 작용의 작용은 이렇게 표현되어 있다.  


하늘이 만물을 낳으실 때에 반드시 그 자질에 따라서 북돋우어 주시니, 잘 자라는 것은 도와주지만, 기울어지는 것은 엎어버린다. 

故天之生物 必因其材而篤焉 故栽者 培之 傾者 覆之 (중용 17장)


군주가 수신하지 않으면 사람을 모르고, 사람을 모르기에 자신의 권력이 어디서부터 비롯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권력을 휘두르기만 하려 한다. 게다가 그 명령조차도 늘 분별력이 있기가 불가능하다. 함정에 몰아넣어도 그것이 함정인 줄도 빠지고, 측근이라는 자들이 군주의 이름으로 전횡을 일삼을 수도 있다. 그의 명령이 분별력을 잃는 것은 그가 특별히 미욱한 군주여서가 아니라, 한 사람의 개인이 늘 분별력을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국정은 위태로워질 것이 당연하고 그의 정치는 더 이상 소생의 가망이 없는 것이다. 중용에서 말하는 하늘은 가망 없는 것을 북돋워주지는 않는다. 하늘은 만물을 낳고 그 자질에 따라 북돋아주고, 잘 자라는 것은 더 잘 자라게 해 주지만, 비실거리는 것은 가차 없이 엎어버리고 새 것을 낳는다. 


새로운 군신관계를 설정하는 것은 군주에게 선택지가 아니라 필수적인 것이다. 공자는 “其人亡則其政息(기인망즉기정식)” 그럴만한 사람들이 없어서 그 정치가 행해지지 않는다고 했으니, 그 정치가 없으면 더 이상 군주의 존재도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새로운 관계는 군주의 존재조건인 셈이다. 그래서 공자는 군주에게 백성을 불쌍히 여기사 부디 선의(善意)를 가져달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공자는 “其人存則其政擧(기인존즉기정거)”를 말하여서, 군신간의 새로운 관계를 설정하려 한 것이다. 요즘말로 하면 군주제의 민주화인 셈이다. 공자는 군주에게 그것만이 군주가 자신을 지키는 길이라고 말했다. 


글_최유미

  1. H. G 크릴, “공자-인간과 신화”, 지식산업사, p. 202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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