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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약선생의 도서관

『장자』, 우리의 농단과 싸우자

by 북드라망 2016. 11. 8.

『장자』, 우리의 농단과 싸우자



정치권이 시끄럽다. 대통령이 이른바 비선실세의 꼭두각시 노릇을 했다고 한다. 장관들도 얻기 힘든 연설문이나 국정 자료가 사전에 비선실세의 손으로 넘어갔다. 대통령은 재벌회장들을 불러 이름도 이상한 어떤 재단에 돈을 내라고 했다는 소식도 들린다. 청와대에는 ‘문고리 3인방’이 있어서, 대통령에게 보고하려면 이 세 사람을 통하지 않고는 불가능했다고도 한다. 도무지 상상하기도 힘든 ‘국정농단(國政壟斷)’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농단’이라는 단어는 『맹자』에 나오는 말이다. 맹자가 제나라에 있을 때의 일이다. 수년간 제나라 선왕(宣王)의 정치고문이었던 맹자는 왕이 도무지 자신의 진언을 들어주지 않자, 객경(客卿, 외지 출신 관리)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선왕은 그제야 후회를 했는지 제나라의 수도인 임치(臨淄)에다 맹자의 집을 마련해주고 만종(萬鐘)의 곡식을 녹으로 주겠으니, 제발 다시 머물러 달라고 부탁한다. 객경으로 있으면 비정기적으로 지원하게 되지만, 이제부터는 정규직 고위 공무원으로 등용시키겠다는 소리로 들린다.


그러나 그것은 말 잃고 마구간 문 잠그는 꼴. 그렇게 할 요량이었으면 평소에 잘 대접해주지, 떠나겠다니까 손을 끄는 모습이 어딘지 탐탁지 않다. 아니나 다를까, 맹자는 단번에 그 제안을 거절하는데, 바로 그 거절의 변에 ‘농단’의 흥미로운 이야기가 담겨 있다.


맹자는 자신이 결코 부귀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라면서, 사람들이 쉽게 돈을 벌려고 한다는 예로 그 유명한 ‘농단(壟斷)’을 끄집어냈다. 물건을 사고파는 시장에서 어떤 사람이 사방이 훤히 보이는 높은 곳에 올라가 이익이 나는 곳을 혼자 알아내고선 시장의 이익을 그물질 하듯 싹 거두어 갔다(必求壟斷而登之, 以左右望, 而望市利. 「공손추 하」[각주:1]).


결국 ‘농단’이란 일반인들은 도무지 알길 없이 모든 일이 훤히 보이는 높은 언덕이라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남몰래 이익을 취할 수 있는 위치이다. 사람들이 이를 보고 천하게 여기고 그에게서 세금을 징수하였다고 한다. 세금의 계보학을 하나의 우화를 가지고 설명한 장면이다. 맹자의 계보학으로 보자면 세금은 정보를 독점하여 혼자만 이익을 취하는 자에게 처음 매겨진 것이다. 


농단에서 바라본 마을 풍경


그러나 나는 이 우화를 읽을 때 좀 이상하게 여겼다. 뭐든 남들보다 먼저 사태를 파악하고 행동하는 것이 무엇이 잘못인가. 전체 구도를 잘 볼 수 있는 곳에 자리 잡아 사건을 정확하고 신속하게 대응하는 것이야말로 삶의 기술이 아니던가 말이다. 그렇게 하지 못해 문제지, 만일 내게 그런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리 안할 이유가 없어 보였다. 이 문제는 이후에도 내게 계속 골칫거리였다. 전체 구도를 알고, 그 구도 아래에서 가장 유리한 길을 찾는 것이 왜 비판받는가. 


그런데 이 문제 깊은 곳에는 만만치 않은 주제가 스며들어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뜻밖에도 『장자』를 읽으면서였다. 문체나 성격이 전혀 다른 책인 『장자』로부터 맹자의 주장을 이해했다는 것이 좀 어색하게 들릴지 모르겠다. 


그러나 맹자와 장자는 동시대인이다. 사마천의 『사기열전』에서도 제나라 선왕이나 양나라 혜왕과 동시대 인물로 장자를 소개한다. 하지만 『맹자』를 통틀어 보아도, 그는 장자를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마치 니체와 마르크스가 동시대인이지만, 서로 전혀 언급하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대개 유교와 도교 간에 비판적인 입장 때문이었다고 보기 쉽지만, 나는 그들이 적대하기 때문이라기보다, 서로 노는 물이 다르기 때문에 언급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맹자는 ‘질서의 세계’에 있었지만, 장자는 ‘자유의 세계’에 있었다.[각주:2]  

단지 다른 세계에 있었던 것이지, 그들은 서로 적대하는 자들이 아니다. 오히려 나는 그들이 서로를 지극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고 생각한다. 


장자는 삶과 앎에 대하여 독특한 시각을 갖고 있다.  「양생주」 맨 처음에 나오는 잠언은 이 독특한 시각을 대변하는 문장인데, 그것은 맹자의 ‘농단 비판’을 이해할 열쇠다.


“우리의 삶에는 끝이 있지만 앎에는 끝이 없다. 끝이 있는 것으로써 끝이 없는 것을 좇으면 위태로울 뿐이다. 그런데도 알려고 한다면 더욱 위태로울 뿐이다. 착한 일을 하면 소문이 나지 않게 하고, 악한 일을 하더라도 형벌에 저촉되지 않게 한다. 그렇게 정 가운데 길[督]을 따르면 몸을 온전히 지킬 수 있고 평생을 무사히 보낼 수 있으며, 부모를 공양하고 천수를 다할 수가 있다.”[각주:3]


현실 세계로 떨어져 ‘어떤 한 몸’을 얻어 살아간다는 것은 ‘끝이 있는 운동’으로 들어왔다는 뜻이다. 현실의 우리는 아무리 애를 써도 ‘어떤 한 몸’의 한계를 넘어 서지는 못한다. 즉, 몸은 죽음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이리 이야기하면 어떤 사람들은 그런 한계를 넘어서도록 하는 것이 바로 과학과 같은 지식들이 아닌가, 라고 반문한다. 그 말은 전적으로 맞다. 과학과 같은 지식은 내 몸의 한계를 훌쩍 넘어 버린다. 내 몸은 전혀 날지 못하지만, 인류는 과학의 힘으로 우주선을 타고 달에도 간다. 그런 의미에서도 앎은 끝이 없는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그것이 현실적인 몸을 무시하고, ‘나’라는 한계 안에 그 앎을 모두 실현하려는 순간, 그것은 곧바로 내 삶을 위태롭게 한다. 즉 나의 생명은 무너지고 만다. 물론 그 지식으로 어떤 한 두 사람이 달에 가고 지구를 한 바퀴 돌기도 하겠지만,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게 되는 것은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서일 것이다. 아니, 가능할지도 그때 가봐야 알 수 있다. 그러나 구체적인 내가 하는 것과 보편적인 인류가 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일이다. ‘지금의 나’, 그러니까 어떤 한 몸으로 태어나 일상인으로 살고 있는 현실의 ‘나’에게 그것은 도무지 불가능한 일이다. 끝이 없는 앎이 삶의 영역으로 스며드는 것은 아주 오랜 시간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계 지워진 내 몸에 그것을 당장 실현하고자 할 때, 나는 바로 부서지고 만다. ‘끝이 없는 앎’을 ‘끝이 있는 삶’에 구현하고자 하면 구체적인 생명을 무너뜨리게 된다. 


'초월' 속에서 무너지는 구체적 '생명'

맹자가 ‘농단’을 비판한 것은 바로 여기에 있다. 동아시아의 현인들은 ‘초월적인 앎’에 대해서 극도로 경계했던 것이다. 삶의 크기를 벗어나 어떤 초월적인 위치에서 무한한 앎을 획득하고자 하는 것은 에너지와 생명력을 한없이 필요로 한다. 심지어 어떤 거짓을 동반하지 않고서는 앎을 현실화시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동아시아인들이 그런 앎의 유형을 몰라서 그것을 획득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생명적 잠재력을 보존하면서 삶을 살아내기 위해서 그런 소모적인 앎에서 의도적으로 등을 돌렸다고 해야 할 것이다.


맹자의 농단은 바로 그런 초월적인 앎을 통해 획득한 이익에 대한 비판이다. 농단으로 얻은 이익은 어디선가 생명력을 파괴하거나 소모하여 획득했을 것이 틀림없고, 그런 이익은 반드시 획득해서는 안 될 ‘초과이익’일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자는 모두 천하다고 생각했다(人皆以爲賤).[각주:4]


말하자면 세금은 그런 초과이익에 대하여 물린 것이었다. 즉 이른바 초월하고자 하는 것에 대한 벌금인 셈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고대에 초월적인 것과 이익은 같은 것이다. 맹자의 ‘농단 비판’은 맹자가 그리 의식하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초월적 앎=초과이익’에 대한 동아시아의 오랜 경계심이 표출된 계보학 비판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장자의 양생(養生)은 맹자의 무의식을 보여주고 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맹자와 장자는 사유의 앞뒷면이다. 


그러나 이미 우리 신체에는 ‘초월적인 앎=초과이익’에 대한 유혹이 프로그래밍되어 있기도 하다. 우리가 흔히 아는 조릉(雕陵)의 고사는 이를 잘 보여준다. 장자는 조릉이라는 밤나무 밭 울타리를 거닐다가, 문득 남쪽에서 이상한 까치 한 마리가 날아오는 것을 보았다. 이 새는 장자의 이마를 스쳐 지나가, 숲에 가서 멎었다. 장자는 재빨리 다가가 활을 쥐고 그 새를 쏘려 했다. 그러다 문득 보니 매미 한 마리가 시원한 그늘에 멎어 제 몸을 잊은 듯 울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런데 바로 그 곁에 사마귀가 이 매미를 잡으려고 정신이 팔려 스스로의 몸을 잊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순간 장자가 잡으려고 했던 까치가 이 사마귀를 노리고 거기에 정신이 팔려 제 몸을 잊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이 절묘한 장면을 포착한 장자는 갑자기 무서운 생각이 들었는지, 활을 버리고 도망쳐 나왔다. 이 우화의 참여자들은 모두 이익이라는 미끼에 이끌려 자신을 잊고 외부의 것에 자신을 맡기고 있었다. “나는 외물에 사로잡혀 내 몸을 잊고 있었다. 즉 흙탕물을 보느라고 맑은 못을 잊고 있었다.”(『장자』 「산목」 제20)[각주:5]

결국 장자는 밤나무 밭지기로부터 밤을 훔쳤다고 꾸짖음을 당한다. 그 뒤로 석 달 동안이나 불쾌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두 가지의 이야기가 중첩되어 있다. 하나는 우리가 이익이라는 미끼와 그 이익을 보장해주는 초월적인 착각(장자가 상대 몰래 사냥을 하려는 것)에 쉽게 빠져든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익은 미끼일 뿐이고, 앎은 망상일 뿐이다. 왜냐하면 결국 밤나무 밭지기에게 꾸짖음을 당하고 말 것이니까. 그런데 장자는 다른 하나를 더 일러준다. 삶의 자리에서는 이런 연쇄가 부득이하다는 것이다. 거꾸로 이야기한다면 산다는 것은 그런 “초월적인 앎=초과이익”의 유혹 앞에 부득이하게 서게 된다는 것이다. 이 의미에서 삶은 위태롭다. 삶은 미끼와 착각에 쉽게 빠지며, 그런 미끼와 착각을 알면서도 매번 그 앞에 설 수 밖에 없다. 심지어 그런 미끼와 착각을 부득이하게 먹고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아마도 장자가 조릉의 사건을 겪고 석 달 동안이나 불쾌했다고 한 것은 이런 사실을 불현듯 깨달았기 때문이지 않았을까. 우리가 ‘초월적 앎=초과이익’에 쉽게 빠지며, 또한 그것이 생명력을 쉽게 없애기 때문에 경계해야 한다는 것도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내기 위해서는 그런 외물의 연쇄 속에 자신을 밀어 넣지 않을 수 없는 부득이함을 장자는 너무나 잘 안다. 이렇게 잘 아는 장자도 매번 자신을 잊고 이 속으로 굴러 떨어지고 만다. 장자의 불쾌함은 이것에서 비롯된다. 알면서도 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맹자가 말하는 ‘농단’이 바로 위태로운 우리의 삶을 대변하는 말인 듯이 보인다. 나는 언제나 농단에 서 있는 것이다. 그 높은 언덕에 올라 어디 이익이 있는지 두리번거리며 자신을 잊고 있는 나야말로 ‘최순실’이 아니었던가. 언제나 알면서도 그 자리에 기어코 올라가 다른 이들의 삶을 부수고 나만 획득할 수 있는 꿀을 찾는 짓을 하고 있는 ‘나’가 바로 ‘최순실’이 아닌가. 


나는 언제나 농단에 서 있는 것이다. 우리 안에 괴물이 들어서 있으며,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농단에 올라 자신도 모르게 추한 짓을 해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심지어 이제 농단을 찾아 나서고, 그 농단이 보이면 다툼 속에서 그 농단을 차지하려고 서로 싸우고 있는 것은 또 아닌가. 우리에게 초월적이고 초과적인 앎과 이익에 대한 유혹이 이리도 깊다. 그런 것에 유혹 당한 삶은 조릉의 장자처럼 나 자신을 잊고 만들어진 기만적인 삶이다. 이런 기만적인 삶과 싸우는 투지를 보여야 할 때다. 우리 모두 그런 기만적인 나와 싸우기 위해서 모여야 할 때다. 

  1. 맹자 지음, 『맹자』, 박경환 옮김, ㈜홍익출판사, 2005, 132쪽. [본문으로]
  2. 장자는 이를 ‘방내(方內)’와 ‘방외(方外)’로 구분한다. 이때 방(方)은 법(法)이다. 방내는 질서가 있는 곳으로 통상 천하라고 일컫는다. 방외는 자유로운 곳으로 통상 강호라고 일컫는다. 전호근 선생은 방내와 방외를 넘나드는 초절정 고수로 공자(孔子)를 든다[전호근 지음, 『장자강의』, 동녘, 2015, 8쪽.]. 그러나 장자는 공자의 입을 빌려 스스로 자신을 방내인(方內人)으로 규정하였다. 자상호(子桑戶)라는 사람이 죽자 자공이 문상을 갔는데, 슬퍼해야 할 친구들이 오히려 자상호가 근본인 진실로 돌아갔다고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이를 전해 들은 공자가 “그들은 이 세상 밖에서 노니는 사람들이고, 나는 이 세상 안에서 노니는 사람이다”(彼遊方之外者也, 而丘遊方之內者也)라고 했다[안동림 역주, 『장자』, 현암사, 1993, 205쪽.] 이어서 그는 이 두 세계가 서로 미치지 못한다(內外不相)고 명확히 말한다. 공자는 상대의 세계를 지극한 시선으로 바라볼 줄 아는 자다. 결코 적대하지 않는다. [본문으로]
  3. 안동림 역주, 『장자』, 현암사, 1993, 91쪽.(번역은 인용자가 약간 수정) [吾生也有涯, 而知也无涯. 以有涯隨无涯, 殆已. 已而爲知者, 殆而已矣. 爲善无近名, 爲惡无近刑. 緣督以爲經, 可以保身, 可以全生, 可以養親, 可以盡年. 여기서 「督」은 등의 중앙을 중심으로 상하로 뻗은 혈맥인 독맥을 일컫는다. 독맥이 등의 중앙에 있기 때문에 ‘정 가운데 길’이라고 번역해 보았다. 독맥의 독(督)은 ‘총괄하다’는 뜻이다. 독맥은 ‘양맥(陽脈)의 바다’로서 양경의 맥기를 통솔하는 작용이 있다. 또한 독맥은 척추 안쪽을 순행하여 뇌에 낙하하므로 뇌와 척수에도 밀접하게 관계가 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독맥은 ‘생식기(胞中)’에서 시작되어 신(腎)에 속하므로 생명력을 의미한다. 역대 의가들은 생식기능장애 질환을 치료할 때 이 독맥을 보하는 방법을 상용하였다. 즉, 독맥은 생명력의 중심인 것이다. 장자의 양생은 이 생명의 길을 중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배병철 편, 『기초한의학』, 성보사, 2005, 320~321쪽.] [본문으로]
  4. 맹자 지음, 『맹자』, 박경환 옮김, ㈜홍익출판사, 2005, 132쪽. [본문으로]
  5. 안동림 역주, 『장자』, 현암사, 1993, 503~504쪽. [吾守形而忘身, 觀於濁水而迷於淸淵.]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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