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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나의 고전분투기

안분(安分) - "자신을 바르게 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구하지 않으니"

by 북드라망 2016. 11. 3.

안분(安分)

"자신을 바르게 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구하지 않으니"



군자는 현재 자신의 자리에 맞게 처신하고, 그 밖의 것은 바라지 않는다.

君子군자 素其位而行소기위이행 不願乎其外 불원호기외


이것은 중용 14장의 첫 구절로 자신의 자리를 편안히 여긴다는 안분(安分)에 관한 것이다.  오늘날의 관점으로 보면 안분(安分)은 시대착오적인 말이다. 신분제사회를 정당화하는 철학적 언명이 바로 안분(安分) 아니겠는가? 나는 여자로 태어난 것을 너무도 원통하게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우리 엄마는 딸을 여섯이나 낳았고 끝내 아들을 얻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 자매들에게는 행운이었다. 비교대상이 없었기 때문에 집에서는 특별히 여자라고 차별을 받으며 자리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런데 어떤 계기였는지는 생각나지 않지만, 나는 남자와 여자가 결코 동등하지 않다는 준엄한(?) 현실을 확 깨달아버렸다. 아마 중학생이 되고 이런 저런 책들을 읽고 나서였을 것이다. 그때부터 나는 남자들에게 뒤지지 않으려고 고군분투했던 것 같고, 거의 싸움 닭 수준으로 날을 세워서 살았다. 휴~ 생각만 해도 피곤한 날들이었다. 나는 마흔이 넘고서야 나의 여성성과 어느 정도 화해할 수 있었다. 나이가 든 탓도 있겠지만 그렇게 날을 세우고 사는 것이 너무 피로했기 때문이었다. 타고난 자리를 편히 여기지 못하면 삶은 참 고달파진다. 그러나 그 자리 자체가 비천하면 삶은 더욱 비참하다.  


어떻게 자아와 화해할 수 있을까?


비천한 자들에게 안분(安分)하라는 말은 욕지기가 나올 만큼 기만적인 말이었을 게다. 그런데 어째서 유가(儒家)는 이렇게 말도 안 되는 기만적인 언명을 내세울 수 있었을까? 게다가 초기 유자(儒者)들의 처지는 고관대작들이 자신을 써주지 않으면 끼니 잇기도 힘들었다. 그런 자들이 자신의 자리를 편히 여기는 것을 덕목으로 내세우는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중용의 첫 문장을 다시 떠올려 보자. 주자는 이 문장에서 신분제의 근거를 찾는다. 


天命之謂性(천명지위성), 率性之謂道(솔성지위도), 修道之謂敎(수도지위교)

“하늘이 만물에게 부여해 준 것을 성(性)이라 한다. 

 하늘이 부여한 성(性)을 따르는 것을 도(道)라고 한다. 

 도를 세상에 펴는 것을 교(敎)라고 한다.”


이 문장의 포인트는 만물은 제각기 고유한 성(性)을 부여받고 태어난다는 것이다. 성(性)은 각자에게 고유한 것이므로 모두 다르다. 주자의 주석에 따르면, 가장 성공적인 삶은 자신이 부여받은 성(性)을 따라 사는 것이고, 그것을 위해서 성인(聖人)이 예악형정(禮樂刑政)등속의 교(敎)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신분제는 교(敎)의 일환이다. 유가는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아버지의 자리와 자식의 자리가 있는 것처럼, 임금의 자리와 신하의 자리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인식했다. 정해진 자리는 인간 삶의 조건인 셈이다. 그러나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는 생물학적인 관계이지만 임금과 신하는 다르다. 태어나보니 임금이고 태어나보니 천한 백성일지라도 왕후장상(王侯將相)의 씨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니 그 관계는 임의적인 것이다. 임의적인 관계는 위태롭기 짝이 없다. 그래서 지배자들은 필사적으로 그 임의성에 필연성을 부여하고자 했다. 


하(夏)나라를 이은 은(殷)나라의 지배자들은 천명(天命)을 내세웠다. 하늘이 자신들을 지배자로 명령했다는 것이다. 누가 본 것도 아니지만, 하늘의 명령은 묻거나 따지는 것을 불허하는 권위를 가진다. 그러나 주나라는 상국(上國)인 은을 멸망시키고 그 자리를 차지했다. 하늘의 명령을 인간이 중단 시켜버린 셈이다. 그러니 천명(天命)의 개념도 바뀌지 않을 수 없었다. 주나라가 설명해야 하는 것은 그들이 저지른 명령의 위반이다. 주나라의 시조들은 준명불이(峻命不易), 천명을 지키는 것은 쉽지 않다고 하면서 천명과 민심을 연결시켰다. 유가들은 민심을 얻었기에 나라를 얻었고(得衆則得國) 민심을 잃으면 나라를 잃는다(失衆則失國)고 말한다. 다스리는 자와 다스림을 당하는 자의 관계를 필연적인 것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힘이 아니라 다스림을 당하는 자의 승복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피지배계급의 피지배는 필연적인 것인가?


신분제의 장점은 무엇보다 나라의 안정일 것이다. 날 때부터 자리가 정해져 있고 변경 불가능하다면, 더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아귀다툼을 벌이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생물학적인 관계가 아니라면, 자리를 변경불가능하게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누구라도 지배자가 되려하지 지배당하고 싶겠는가? 제후도 힘이 강성해지면 천자의 자리를 넘보는 것은 당연지사다. 하지만 왕조가 한번 바뀔 때마다, 죄 없는 백성들은 얼마나 많이 죽어나가야 하는가? 전쟁에 동원된 백성들의 처지는 바뀌는 것이 없지만  왕의 성씨(姓氏)을 바꾸는데 목숨을 내어 놓아야 하니 말이다. 유가가 안분(安分)을 중시하는 것은 약육강식의 아귀다툼을 막고자 하는 것이었다. 


부귀한 처지에 있으면, 부귀한 사람의 도리를 행하고, 

素富貴소부귀 行乎富貴행호부귀

빈천한 처지에 있으면 빈천한 사람의 도리를 행한다.

素貧賤소빈천  行乎貧賤행호빈천

오랑캐의 땅에 살게 되면 그 상황에 맞게 행동한다.

素夷狄소이적 行乎夷狄 행호이적

전쟁과 같은 어려운 상황에 처하면 또한 그에 맞게 행동한다.

素患難소환란  行乎患難행호환란

군자는 어떠한 상황에 처하든 스스로 얻지 못하는 것이 없다. 

君子 無入而 不自得焉


부귀(富貴)와 빈천(貧賤)의 차이, 그리고 누구는 천자의 나라에 태어나고 누구는 오랑캐의 나라에 태어나는 것은 인력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일이라는 인식이 이 문장에는 있다. 그래서 이 구절은 어떤 자리에 처해도 그 자리에서 할 수 있는 덕을 추구하라고 가르친다. 태어나보니 ‘금수저’라면 그가 가진 것을 나누어야 하고, 태어나보니 ‘흙수저’라도 자신의 처지를 부끄럽게 여기지 말라는 것이다. 뜻하지 않게 어지러운 세상을 만난다면, 고관대작이라면 그 군주와 운명을 같이하는 것이 의(義)에 맞지만, 그렇지 않은 바에야  괜스레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지 않도록 자신과 가족을 지키는 것을 우선시 하라는 것이 이 구절이 가르치는 것이다. 유가에게 군자는 그 피할 수 없는 삶의 조건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어떤 조건에서도 자신의 삶을 도(道)를 향해 고양시킬 수 있는 자다. 


하지만 우리는 유가(儒家)에게 이렇게 따져 물을 수 있다. “부귀와 빈천의 차이가 없도록 사회시스템을 만들고, 천자의 나라와 오랑캐의 나라를 구분하지 않으면 될 것을, 불평등한 조건은 그대로 두고 그 자리를 어떻게 편히 여길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유가라면 우리의 반론에 이렇게 말할 것이다. “모두 저마다의 타고난 기질이 다른데, 제도가 어떻게 모두를 동일하게 만든단 말이요? 차라리 차이 나는 자리가 있다는 것을 피할 수 없는 삶의 조건으로 간주하고, 그것이 가장 덜 억압적일 수 있도록 끊임없이 그 방책을 마련하려 하는 것이 현실적이지 않겠소? 그러려면 윗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덕성을 함양해야 하는 것이 일차적이오. 아마도 사람들은 우리를 이상주의자 혹은 귀족주의자라고 비판하겠지만, 우리가 백성들의 힘을 무시하고 귀족들의 도덕성에만 기대려는 것이 아니라오. 우리가 윗자리에 있는 자들에게 가르치려는 것은 스스로  자신의 권력을 내려놓지 않으면 반드시 다른 이에 의해서 허물어진다는 것이오. 그래서 덧없는 권력을 추구할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덕성을 추구하라고 가르치는 것이오.” 


윗자리에 있을 때 아랫사람을 업신여기지 않으며, 아랫자리에 있을 때 윗사람을 끌어내리지 않는다. 在上位(재상위) 不陵下(불릉하) 在下位(재하위) 不援上(불원상) 


이 구절을 처음 읽었을 때는 좀 실망스럽기도 했다. ‘눈 가리고 아웅’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주인이 좋은 태도로 대해준다고 해도, 자유를 박탈당한 노예의 자리는 굴종의 자리일 뿐 편안해질 리가 없다. 안분(安分)이 겨우 이런 눈가림으로 달성될 수 있다는 말일까라고 반감이 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不陵下(불릉하), 아랫사람을 업신여기지 않는다는 의미를 그렇게 표면적으로 이해해도 좋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아랫사람을 업신여기지 않는다는 것은 자리를 지배의 도구로 사용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주인과 노예의 구도는 아무리 해도 지배와 억압의 구조다. 그러나 그런 관계는 오래가지 못한다고 유가는 경고한다. 아랫사람을 업신여기면 그는 윗사람을 끌어내리려 사력을 다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자리바꿈만 있을 뿐 지배와 억압의 구조가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유가는 제왕들에게 끊임없이 군주와 신하의 관계는 파트너관계일 뿐이라고 강조한다. 지배당하는 자가 그 지배를 승복할 수 있는 조건은 무엇인가? 그것은 在上位(재상위) 不陵下(불릉하),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업신여기지 않고, 파트너 관계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在下位(재하위) 不援上(불원상)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끌어내리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도 윗자리로 올라가고 싶고, 부귀를 얻고 싶은 마음을 없앨 수 있을까? 아마도 쉽지 않을 것이다. 지금 자신이 가진 것 보다 윗자리와 부귀가 명백히 더 높은 가치를 지닌 것이라면 그 마음을 누르기는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그래서 유가는 가치의 기준을 외부에 두지 말라고 가르친다. 사람마다 다 처지도 다르고 능력도 다른데, 외부의 획일적인 가치를 무작정 추구해야 한다면 삶이 얼마나 고달파지겠는가? 


자신을 바르게 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구하지 않으니 원망이 없다. 위로는 하늘을 원망하지 않으며 아래로는 다른 사람을 탓하지 않는다.

正己而不求於人(정기이불구어인) 則無怨(즉무원) 上不怨天(상불원천) 下不尤人(하불우인)


정기이불구어인(正己而不求於人) 자신을 바르게 하고 다른 사람에게서 구하지 않는다는 것은 남과 비교해서 자신의 처지와 재주를 하찮은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으로 이해된다. “노력하면 안 되는 일이 없다”는 얼마나 잔인한 말인가? 타고난 재주가 다른데, 그것과는 무관하게 무조건 노력하라고 하면서 획일적인 기준을 들이대는 것이 바로 이 말이다. 공자는 『논어』에서 “만약 부귀가 구하고자 한다고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나는 말고삐를 잡는 일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겠다.”라고 말했다. 자신이 원한다고 다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이야 말로 안분(安分)의 첫 번째 조건일 것이다. 그런데 요즘은 “하고자 하는 굳은 의지를 가지고 노력하면 온 우주가 나서서 돕는다”는 황당한 말로 사람들을 마구 다그친다. 제발 안분(安分)할 수 있게 좀 내버려 두면 좋겠다. 하지만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아도 최소한의 생계는 보장되는 그런 사회이면 정말 좋겠다.


글_최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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