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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가 삼국 전쟁에서 승리한 까닭은?

by 북드라망 2016. 11. 1.

병법을 뛰어넘는 전쟁기계 : 승리하거나 죽거나(2)

신라가 삼국 전쟁에서 승리한 까닭은?



신라인의 호국의지


일부 역사학자들은 신라가 한민족에 대한 동류의식과 삼한일통(三韓一統)에 대한 염원을 가지고 한반도를 통일했다고 한다. 명분이 분명한 싸움이었다는 것이다. 글쎄? 한민족 동류의식이 삼한통일의 기저가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신라는 고구려, 백제를 원수로 보았으며, 절치부심 두 나라를 물리치기 위해 당나라와 손잡았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 삼국 전쟁을 통해 한반도는 다른 역사를 맞이했다는 사실이다. 7세기의 전쟁으로 한반도는 고대 문화에서 중세 보편주의 문화로 진입하게 되었다. 하나의 민족, 하나의 국가가 되면서 한반도는 중국이라는 중세의 보편주의 문화에 복속되었다. 당나라 문명, 아니 중국 문명이 동아시아의 보편 문명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당唐나라 시대 복식 그림


한반도상에서 7세기의 전쟁은 심각한 역사적 변형 혹은 새로운 시대의 개시를 가져오는 보편적 조건이었음에 틀림없다. 선덕여왕에 이어 등극한 제28대 진덕여왕은 "나라 밖 오랑캐들이 명령을 어긴다면, 죽이고 전복시켜 천벌을 입으리라."는 내용이 담긴 <태평송>을 당나라 황제에게 보내고, 설날 아침의 예를 행하며 시랑이란 벼슬 이름을 처음 사용하는 등 중국을 천자의 나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통일 이후 신라가 당나라를 한반도의 영토에서 물리쳤지만, 중국 문화에 대한 편입은 빠른 속도로 이어졌다. 전쟁의 공과는 분명 있었다. 


신라는 고구려, 백제보다 후발 국가이고, 고구려, 백제, 일본 등의 빈번한 군사적 압박에 시달리고 있었다. 신라는 수와 당이라는 거대 제국이 동아시아의 세력 판도에 강한 규제력을 행사하던 시기에, 당나라의 힘을 이용하여 고구려와 백제를 병합할 수 있었다. 동아시아의 국제 환경을 유리하게 이용한 신라가 한반도를 통일했던 것이다. 주변의 역학관계를 잘 읽어낸 신라가 삼한을 통일한 것은 객관적 평가이고, 『삼국사기』 안에서 삼국 통일의 주역이 된 신라는 무엇보다 호국에 대한 의지가 강했다.

 

제13대 미추잇금은 김알지의 7세손이다. 왕위에 있은 지 23년 만에 붕했는데 능은 흥륜사 동쪽에 있다. 제14대 유리왕 때 이서국 사람들이 금성에 쳐들어오자 우리도 군사를 크게 일으켜 막았는데 오래 버틸 수 없었다. 그때 홀연히 신병(神兵)이 나타나 도왔는데, 모두들 댓닢을 귀에 꽂고 우리 군사와 힘을 합해 적군을 격파했다. 그러나 적군이 물러간 뒤에는 모두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고 다만 댓잎이 미추왕릉 앞에 쌓여 있는 것만 보였다. 죽현릉이라고 불렀다.(『삼국유사』) 


미추왕은 죽어서도 외적으로부터 신라를 지키는 데 여념이 없다. 댓잎으로 군사를 만들어 이서국을 물리친다. 귀신이 되어서도 나라를 지키는 미추왕은 신라의 정신 그 자체이다. 

죽은 미추왕은 혜공왕 대에 한 번 더 등장한다. 혜공왕 때 삼한통일의 주역이었던 김유신 귀신이 자기 후손들이 공로를 인정받지 못하는데 불만을 품고 신라를 떠나겠다고 미추왕 귀신에게 선언한 것이다. 미추왕은 김유신을 설득하여 신라에 눌러 앉힌다. 김유신이 떠나면 신라가 위태롭기 때문이다. 문무대왕은 죽어서도 나라를 지키기 위해 바다의 큰 용이 되었고, 김유신은 천신이 되었기에 이들이 떠나면 나라는 위험하다. 귀신을 대화에 놀라 현실의 신라인들은 조처를 취한다. 공신 김경신을 김유신 능에 보내어 사과하고, 공덕보전 30결을 취선사에 보내 명복을 빌어주자 김유신의 화는 가라앉는다. 이처럼 미추왕의 호국 의지는 죽어서도 꺾이지 않는다. 


신라인들은 그렇게 믿었다. 조상들은 죽어서도 신라를 지켜줄 것이라 믿었던 것이다. 신라가 고구려, 백제에 비해 쇠약했고 왜, 말갈, 돌궐, 고구려, 백제 등의 외침이 빈번했으니 신라를 지켜야 하는 것은 그들의 생존에 다름 아니었다. 호국의지를 불태우며 고구려와 백제라는 적을 원수로 생각하며 이들을 물리칠 것을 맹세했다. 


처음 백제 군사와 더불어 황산에서 싸우는데, 장춘랑과 파랑이 진중에서 죽었다. 나중에 백제를 토벌하는데 그들이 태종의 꿈에 나타나 말했다. "신들이 지난 날 나라를 위해 몸을 바쳐 백골이 되었지만 아직도 나라를 지키고 싶어서 종군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당나라 장수 소정방의 위세에 눌려 남의 뒤만 따르게 되었으니 바라건대 왕께서는 저희들에게 작은 세력이라도 더해주소서."(『삼국유사』) 


장춘랑과 파랑도 미추왕처럼 죽어서도 끝내 나라를 수호하겠다고 나선다. 소정방의 뒤를 따르지 않고 독자적으로 적을 쳐부수고 싶다는 욕망은 죽어서도 강렬하다. 


김유신 동상


『삼국유사』에 의하면 김유신의 전신은 고구려의 음양가 추남이다. 국경에 물이 역류하여  추남에게 점을 쳐 "대왕의 부인이 음양의 도를 역행하므로 그 증험이 이렇게 나타나는 겁니다."고 말했다. 대왕이 놀라 괴이하게 여기고 왕비도 크게 노해 요망한 여우의 말이라고 하며, 왕비가 왕에게 아뢰어 다른 일로 시험하되 만약 틀리면 중형으로 다스리게 했다. 그래서 쥐 한 마리를 함속에 감추고 이것이 무슨 물건이냐 했더니 틀림없이 쥐인데 여덟마리입니다고 대답했다. 쥐가 한 마리라 목을 베려고 했는데 추남이 맹세하면서 "내가 죽은 뒤 대장이 되어 반드시 고구려를 멸망시키겠다"고 했다. 쥐의 배를 갈라보니 새끼 일곱 마리가 들어 있었다. 대왕이 꿈을 꾸었는데 추남이 신라 서현공 부인의 품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고구려 사람이 유신을 죽이려는 꾀를 꾸미게 된 것이다.(『삼국유사』) 김유신은 전신부터 고구려에 원한을 가진 사람이다. 김유신의 전신은 반드시 고구려를 멸망시키겠다고 말한다. 원수 고구려를 치기 위해 김유신은 태어났다. 신라인들은 이렇게 무장했다. 


17세가 된 김유신이 중악 석굴에 들어가서 몸을 정결히 하고는 "적국들이 무도하여 이리나 범과 같이 우리나라의 영역을 소란케 하여 무사한 해가 거의 없습니다. 내가 한갓 미약한 몸으로 재능과 역량을 짐작하지 않고 환난을 숙청하기로 결심했으니 하늘은 굽어살펴 나를 도와주소서."라고 하늘에 맹세했다. 삼한통일의 의지라기보다는 고구려, 백제, 말갈들이 국토를 침략하는 것을 보고 외적평정에 대한 의분을 길렀던 것이다. 신라인들은 외침 속에 호국의 의지를 다졌다. 신라를 지키겠다는 강렬한 의지가 삼한통일로 이어졌던 것이다. 



후퇴는 없다 : 이기거나 죽거나


신라인들은 전쟁과 죽음에 대해 사유할 여유가 없었다. 외적의 침입에 대응하여 적들을 물리치는 것만이 살 길이었기 때문이다. 하여, 싸움에서 물러나면 나라의 망신이자 불충이며, 집안의 부끄러움이자 불효였다. 『삼국사기』 열전의 많은 인물들은 임전무퇴(臨戰無退)의 정신을 불사르며 단독으로 적진을 향해 뛰어든다. 적을 몇 놈이라도 죽이고 장렬하게 전사하는 것만이 전장에서 할 일이다. 그 외에 다른 것은 없다. 승리하지 못하면 죽이고 죽는 것. 오로지 전쟁기계가 되어 적을 해치는 것이 진정 살 길이라 생각했다. 


수나라에서 유학하고 온 원광법사는 가르침을 달라는 귀산에게 그 유명한 세속오계를 전수한다. 원광법사는 승려가 아닌 신하로 사는 이들에게 세속에서 지켜야 할 다섯 가지 계율을 알려준다. 첫째는 임금을 충성으로 섬기는 것이요[事君以忠], 둘째는 부모를 효성으로 섬기는 것이요[事親以孝], 셋째는 벗을 신의로써 사귀는 것이요[朋友有信], 넷째는 전장에 나가서 물러서지 않는 것이요[[임전무퇴], 다섯째는 생물을 죽여도 가려서 한다는 것[殺生有擇]이다. 


불교의 승려인 원광법사도 신라의 상황에 맞게 계율을 조정한다. 아이러니하지만 임전무퇴!를 말할 수밖에 없는 시대였다. 임전무퇴와 살생유택은 참으로 공존하기 힘든 ‘모순’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그 살생유택의 내용에는 전쟁에 나가 죽이는 것은 포함되지 않는다. 전시는 평상시와는 다르다. 

 

"골라야 한다는 것은 여섯째 재날과 봄․여름에 생물을 죽이지 않는 바니 이는 때를 가림이요. 부리는 짐승을 죽이지 않는다는 것은 말 소 닭 개를 말함이며 하찮은 것을 죽이지 않는다는 것은 고기로서 한 점도 못되는 것을 말함인 바 이것은 물건을 가림이다. 다만 쓸 만큼 죽이고 함부로 죽이려 하지 말 것이니..." 


귀산은 원광법사의 가르침을 받은 이후 백제와 대결하는 전투에 나가게 된다. 이들은 세속오계를 잊지 않았다. 


진평왕 건복 24년 임술 가을 8월에 백제가 대군을 발동하여 아막성을 포위해 왔다. 귀산과 추항은 소감의 관직으로 전지에 나갔다. 백제가 패하자 천산 늪으로 물러와서 군사를 매복시켜 놓고 신라군사가 오기를 기다렸다. 백제 복병이 달려들어 군사를 둘러싸고 항복시켜려 하매 귀산이 큰 소리로 말하기를 "내 일찍이 선생께 듣건대 군사는 적군을 만나서 물러서지 말라고 하였으니 어찌 패하여 달아날 수 있으랴?"하고 적을 쳐서 수십 명을 죽인 다음 자기 말로써 아버지를 태워 보내고 추항과 함께 창을 휘두르며 힘껏 싸웠다. 여러 군사들이 이를 보고 사기가 분발되어 적군을 맹렬하게 치니 백제 군사의 쓰러진 시체가 들판에 가득하고 말한 필 수레 한 채도 돌아간 것이 없었다. 귀산 등은 온 몸이 창에 찔려 돌아오는 도중에 죽었다.(「귀산열전」, 『삼국사기』)  


영화 <황산벌>의 화랑 관창


귀산은 세속오계의 가르침 중 임전무퇴를 몸소 실행한다. 귀산은 패해서 달아나지 않고 마지막 순간까지 전투에 임한다. 온 몸이 창에 찔려서도 싸운다. 전장에서는 다른 선택은 없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싸움. 원광법사는 전쟁에서 살아남는 법이 아니라 전쟁에서 죽는 법을 가르쳤다. 이것만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때문이다. 돌격대 귀산으로 인해 사기가 충천하고 백제 군사들은 절멸했다.   



김유신의 승리 비법, 돌격대 정신


삼국통일을 이끈 김유신! 그는 귀산과 같이 임전무퇴 정신으로 똘똘뭉친 병사를 활용한다. 이른바 돌격대를 앞세운 전법. 패배를 눈앞에 두고 사기가 저하된 병사들을 불러 일으키기 위해서는 두려움 없이 돌진하는 병사가 필요하다. 김유신은 그런 병사를 알아보고, 적진을 향해 홀로 용감하게 진격하도록 고무했다. 그 대표적 인물이 비령자이다. 

 

비령자는 그의 고향과 집안과 성씨를 알 수 없다. 진덕왕 원년 정미에 백제가 큰 군사를 거느리고 무산 감물 동잠 등의 성에 와서 치므로 유신이 보병과 기병 1만을 거느리고 이를 방어했다. 그러나 백제 군사가 매우 날카로워 애써 싸우다가 이기지 못하여 사기가 저하되고 힘이 지쳤다. 유신이 비령자가 힘껏 싸워 적진 깊숙이 들어갈 생각이 있음을 짐작하고 그를 불러 이를기를 "겨울이 찬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의 절개를 아는 법인데 오늘 사태가 위급하게 되었으니 그대가 아니면 누가 용감히 싸우며 특출한 일을 이룩하여 여러 사람의 마음을 격려하겠는가?" 하고 이어 그와 함께 술을 마시면서 친절히 뜻을 표하니 비령자가 공손히 절하고 말했다. "지금 숫하게 많은 사람 가운데 유독 나에게 일을 부탁하시니 나의 마음을 알아주신다고 할 만한지라 진실로 죽음으로써 보답해야 되겠습니다." 


비령자가 종 합절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늘 위로 나라를 위하고 아래로 동지를 위하여 죽을 것이다. 나의 아들 거진이 나이는 비록 어리나 큰 뜻이 있어서 내가 죽으면 그도 반드시 나를 따라 죽으려 할 것이니 만일 부자가 함께 죽는다면 집안사람이 장차 누구를 의지하랴? 네가 거진과 함께 나의 해골을 잘 수습하여 가지고 돌아가 자기 어미의 마음을 위로하게 하라." 하고 부탁을 마치자 곧 말을 채찍질하여 창을 비껴들고 적진으로 돌입해 적병 두어 명을 쳐 죽이고 그도 죽었다. 



거진이 이 광경을 보다가 적진으로 들어가려 하니 합절이 만류하였으나 거진이 말하기를 "아버지가 죽은 것으로 보고도 구차하게 사는 것이 이른바 효자이겠느냐?"하고 칼로써 합절의 팔꿈치를 쳐버리고 말을 달려 적진으로 돌입하여 싸우다가 죽었다. 합절이 말하기를 "나의 주인들은 다 죽었는데 나 혼자 살아서 무엇을 하겠는가?" 그 역시 싸우다가 죽었다. 군사들이 세 사람의 죽는 광경을 보고 감동되고 격분하여 서로 앞을 다투어 나아가서 향하는 곳마다 적의 예봉을 꺾고 진지를 함락시켰으며 적군을 크게 깨뜨려 3천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유신이 세 사람의 시체를 거두어서 자기의 옷을 벗어 덮어주고 울기를 매우 슬피하였다.   


비령자와 그의 아들 거진과 그 집안의 종 합절은 차례로 적진에 돌입해서 싸우다 죽는다. 군사들은 격분하여 적의 예봉을 꺾는다. 동지들의 장렬한 죽음 앞에 무슨 말과 전략이 필요한가? 군사들은 격동하여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비령자의 돌격은 백제의 진지를 쓰러뜨리는 원동력이었다. 최신식 무기와 군사의 숫자로도 감당할 수 없는 것은 죽음도 두려워 않는 돌격대 정신이다. 


신라는 돌격대 정신을 강조했다. 화랑들의 사귐 속에서, 화랑들의 훈련 속에서 그렇게 배워갔다. 집안에서도 전쟁에서 후퇴하는 것은 불효라고 가르쳤다. 승리로 전공을 세워 집안을 빛내거나, 반대로 패배했을 때는 죽이고 죽는 전법으로 집안의 수치가 되지 않는 것이다. 김유신은 자신의 아들 원술랑이 고구려와의 싸움에 패배했음에도 주변의 만류로 살아 돌아왔을 때 용서하지 않았다. 유신은 원술랑의 목을 베어야 한다고 왕에게 아뢰기까지 했다. 왕은 원술랑의 죄를 용서해주었지만 시골로 은퇴하여 아버지를 만나지 못했다. 유신이 죽자 어머니를 만나려 했으나 어머니도 자식 노릇을 못한 아들의 어미 노릇을 할 수 없다고 하며 만나지 않는다. 원술은 당나라 군사와 싸워 전공을 세웠으나 부모에게 용납되지 않은 것이 한이 되어 벼슬하지 않은 채 일생을 마쳤다. 


신라의 군사들은 국가와 가족을 위해 전쟁기계가 된다. 승리하지 않고 살아있는 것은 수치이다. 티벳이 독립을 외치며 저항할 때 달라이 라마는 '살아야한다'고 전했다. 오직 사는 게 중요하다고. 그러나 전쟁은 살라고 말하지 않는다. 죽어서라도 승리해야 한다고 말한다. 신라는 승리 아니면 오직 죽음뿐임을 가르쳤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전장에서 죽었다. 고구려, 백제의 군사들도 무수히 죽었지만 승리한 신라의 군사들도 무수히 죽었다. 전쟁 앞에 실상 승리자는 없지만, 한반도를 평정한 신라가 최종 승리자가 되었다. 승리의 전법은 임전무퇴와 돌격대 정신! 『삼국사기』는 신라가 승리한 이유를 그렇게 정리했다. 그리하여, 「열전」에는 신라 화랑이자 군사들의 장렬한 죽음이 넘치도록 기록되어 있다. 되새김질 하듯 비슷한 그러나 저마다 비장하고 슬픈, 죽음을 향해 돌진하는 병사들을 세밀하게 묘사했다. 승리를 위한 최고 전법, 그 용맹한 군사들을 기술하는 것으로 김부식은 「열전」 의 거의 전부를 할애했다. 


글_길진숙(남산강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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