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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부식,『삼국사기』- 용병 흑치상지에 관한 랩소디

by 북드라망 2016. 10. 18.

병법을 뛰어넘는 전쟁기계 : 승리하거나 죽거나(1)

<용병 흑치상지에 관한 랩소디>



삼국시대, 전쟁의 서사 시대

  

7세기의 한반도는 들끓었다. 신라, 고구려, 백제는 당나라, 일본, 돌궐, 말갈 등 동아시아 여러 나라들과 합종연횡하며 치열하게 전쟁을 치렀다. 신라는 승리하여 한반도를 통일했다. 백제와 고구려는 전쟁에 패배했고, 신라에 복속되었다. 백제는 660년, 고구려는 668년 멸망했다. 신라는 백제를 멸망시킨 뒤 약 8년여 동안 싸워서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영화 <평양성> 중에서


신라, 백제, 고구려 세 나라는 길고 긴 시간 동안 전쟁을 했다. 전쟁이 일상처럼 되었던 긴 시간, 승리했든 패배했든 싸움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엔 죽음과 피폐가 채워졌다. <삼국사기>, 적어도 7세기까지의 기록에서 전쟁은 진정 예외상태가 아니라 정상 상태이고, 평화가 오히려 예외인 것처럼 보인다. 조금 과장하면 삼국시대는 전쟁의 시간이자 이기고 지는 사람들의 시간이다. 


백제와 고구려의 많은 백성들은 전쟁의 와중에 어떻게 살았을까? 그리고 전쟁이 끝난 뒤 어떻게 되었을까? 불행하게도 알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은 죽었을 테고, 일부는 당나라로 끌려갔을 테고, 또 일부는 돌궐, 말갈, 일본으로 도망쳤을 테고, 대부분은 자기 땅에 남아 전쟁 후유증을 앓았으리라. 그랬으리라 짐작해본다. 


<삼국사기>에는 싸우다 죽은 영웅들의 이야기는 남아있지만 전쟁을 겪은 수많은 백성들, 혹은 희생자들의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조선후기 판소리 <적벽가>에서 겨우 군졸들의 목소리가 등장한다. 조조의 군사든 유비의 군사든 왜 싸우는지 모른다. 군졸들은 어머니가 그립고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을 따름이다. 나라를 위한다고는 하지만 누구를 위한 나라인가? 싸워야할 명분이 전혀 없는 군졸들에게 전장에서의 죽음은 개죽음이다. 폭력이 폭력을 부르고 복수가 복수를 낳는다. "만인 사이의 전쟁을 막기 위해 국가를 요청하는 게 아니라 국가의 존재를 위해 만인의 전쟁이 표상되는 것이다." 전쟁은 죄다 명분을 앞세우지만, 그 어떤 명분도 사는 일보다 신성하지는 않다는 걸 <적벽가>는 보여준다. 

<삼국사기>는? 

 

“진덕여왕 가을 8월에 백제의 장군 은상이 군사들을 거느리고 와서 석토 등 일곱 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왕이 대장군 유신과 장군 진춘, 죽지, 천존 등을 시켜 나가서 대항하게 하였다. 여기저기 옮아가면서 싸우기를 열흘이 지났으나 포위를 풀지 못하여 도살성 밑에 나아가 자리를 잡고 유신이 군사들에게 말했다. "오늘은 반드시 백제 사람이 와서 정탐을 할 것이다. 너희들은 거짓 모르는 체하고 함부로 누구냐고 묻지 말라!" 그러고는 사람을 시켜 진중에 돌아다니면서 말하기를 "움쩍 말고 굳게만 지켜라. 내일 구원병을 기다려 결전을 하겠다."고 하였다. 간첩이 이 말을 듣고 돌아가 은상에게 그대로 보고하였더니 은상 등은 증원병이 있다하여 의심을 품고 겁을 내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때 유신 등이 진격하여 적을 크게 부수고 장수와 군관 1백 명을 죽이고 사로잡았다. 군졸 8천9백80명의 머리를 베고 군마 1만 필을 얻었으며 병기 같은 것은 이루 다 셀 수 없었다.” 


김유신이 심리전에 얼마나 탁월한지를 보여주는 한 대목이다. 백제의 정탐꾼을 속이고, 백제 군사들을 위축시키게 만드는 전술을 구사한다. 그리고 백제군을 그야말로 쳐부순다. 군마 1만 필은 살아 포획되었으나 군졸 8천9백80명은 모두 머리를 베였다. 군졸들은 전쟁기계이다. 그들은 베인 머리수만으로 역사를 장식한다. 수많은 죽음들이 전리품이 되어 숫자로 제시되었을 뿐이다. 전쟁의 서사를 장식할 그 어떤 몫도 없이 그들은 진격하거나 머리수로 남거나. <삼국사기>에는 군졸의 목소리는 없다. 그래서 전쟁 기사는 잔인하지 않다. 굳이 전쟁의 현장을 그려내지 않는 한 그 어떤 목소리도 들을 수 없고, 그 어떤 이의 감정도 잡아내기 힘들다. 전쟁에 뛰어든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는 소거된 채 승리자의 전략과 전술, 그 성과만이 기술된다. 


<삼국사기>는 무엇보다 '전투'에 관한 기록이다


<삼국사기>는 과장을 조금 한다면 대부분이 전투에 관한 기록이다. 땅뺏기 싸움! 국가의 확장과 병탄을 목표로 했던 시대. <삼국사기>는 나라를 위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수많은 열사들의 활약으로 가득차 있다. 전쟁터는 영웅의 탄생지가 된다. 전쟁이 시작되었다면, 어쨌든 이겨야 한다. 모순이기는 하지만 살기 위해 싸우지 않는다. 이기기 위해 싸운다. 죽어서라도 승리를 이끌어야 한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최고의 병법이지만, 막상 전쟁이 터지면 둘 중 하나다. 죽거나 이기거나.  


그래서 <삼국사기>에 수록된 '흑치상지'(630-690) 열전은 더욱 소중하다. 내게 가장 흥미로운 열전을 꼽으라면 단연코 흑치상지다. 비록 일반 백성들의 행로나, 군졸들의 행로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지만 패배했으나 죽지 않고 살아남은 장수는 무엇을 했을까하는 궁금증을 아주 조금 해소시켜준다.



용병 흑치상지(黑齒常之)


흑치상지는 백제의 서부 사람이다. 키가 7척이 넘었으며 날래고 억세며 지략이 있었다. 백제의 달솔로서 풍달군의 장수를 겸했다. 소정방이 백제를 평정했을 때 자기 부하와 함께 항복했다. 소정방이 늙은 왕을 가두고 군사를 놓아 함부로 노략질하자 흑치상지가 겁을 내어 좌우 추장 10여명을 데리고 탈출한다. 도망쳤던 백제 군사를 규합하여 임존성으로 가서 굳게 지키니 열흘 안팎으로 상지에게 모여든 군사가 3만이었다. 소정방이 군사를 정비해 그를 쳤으나 이지지 못했고 상지는 마침내 2백여 성을 회복했다. 용삭 연간에 당 고종이 사신을 파견해 상지를 불러 타이르자 유인궤에게로 가서 항복했다.


흑치상지는 신라와 싸운 게 아니라 신라와 연합하여 백제를 치러 왔던 당나라와 싸운다. 이 과정에서 상지는 항복하고 탈출하고 재결집하여 싸우다 마침내는 항복한다. "내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와 같은 장군의 기백은 찾아보기 힘들지만 탈출해서 군사들을 모으고 당나라 군사에 대항하며 2백여 성을 회복한 상지의 전공은 혁혁해 보인다. 김부식은 상지가 항복하는 부분이나, 재결집하는 부분(백제 부흥 운동)에다 어떤 드라마를 가공하지 않았다. <구당서>와 <신당서>에 수록된 흑치상지 열전을 거의 그대로 실었다. 패배한 나라의 장수로서 그가 걸어간 길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백제의 멸망과 함께 항복했다가, 다시 백제 부흥을 위해 싸우다가, 그래도 전세가 불리함을 깨닫고 항복한 장수. 그의 행로를 담담히 기술했다.   


흑치상지黑齒常之


그런데 흑치상지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흑치상지는 당나라에 들어가 좌령군 원외장군 양주자사가 되어 여러 번 전쟁에 종사하여 전공에 의한 벼슬과 특별한 상을 받는다. 또 연연도 대총관이 되어 이다조 등과 함께 돌궐을 쳐서 격파한다. 이 때 좌감문위 중랑장 보벽이 돌궐을 끝까지 추격하여 공을 세우려 하자 황제가 상지와 함께 치라고 명령했으나 보벽이 혼자 진격했다가 적에게 패전을 당하고 군사 전부를 상실한다. 이 때문에 보벽을 옥에 가두어 죽이고 상지도 그에 연좌되어 공로를 인정받지 못한다. 또한 이즈음에 주흥 등이 상지가 응양장군 조회절과 함께 반란을 도모한다고 무고하는 바람에 상지는 조옥(詔獄)에 갇혀 교형을 당한다. 아마도 백제 부흥을 주도했던 흑치상지에게 입혀진 죄목은 잔존 백제세력의 규합과 모반이었으리라. 흑치상지가 죽고 나서 아들 흑치준이 아버지의 억울함을 호소하여 신원이 이루어졌고, 중국 역사서에 그 행적을 남길 수 있었다.    


흑치상지는 항복한 후 당나라의 장군이 되었다. 당나라를 위해 돌궐에 맞서 싸우는 등 백제의 장군으로서가 아니라 당나라의 장군으로서 공을 세웠던 것이다. 흑치상지의 고민과 갈등이 그려져 있지 않기에 당나라에서 장군이 되어 싸우는 심정이 어떤지 우리는 알 수 없다. 다만 흑치상지는 백제에서와 마찬가지로 당나라에서도 혁혁한 전공을 세운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용병이다. 용병으로 살다 용병으로 죽은 흑치상지. 한민족으로서 흑치상지의 행적이 썩 달갑지 않다. 아니 찝찝하다. 김부식은 흑치상지를 도대체 왜 입전했을까?



전쟁기계는 또 전쟁기계로! 


흑치상지는 우리의 기대치를 여지없이 무너뜨린다. 적어도 열전에 이름이 오르려면, 백제를 위해 최후까지 저항했어야 하지 않을까? 혹은 훗날을 도모하는 모습을 보이다가 일격을 가하고 장렬하게 죽었어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김부식이 흑치상지를 입전한 이유에 대해 일말의 의혹을 거둬들이기가 힘들다. 


묘비명도 남아있고, 중국 역사책에도 그 기록이 남아 있다고 다 선택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김부식은 정녕 중국 역사책을 너무 신뢰하여 민족의식 따위는 개나 줘버린 것일까? 김부식은 당태종의 군대를 물리친 고구려 안시성 싸움의 전말도 상세히 기록했다. 당나라의 수만 군사를 버텨낸 안시성 군민들의 활약과 당군사들의 수송로를 끊어낸 그 뛰어난 전술이 김부식 덕분에 대대로 전해졌던 것이다. 이 기록도 중국에만 남아있다. 그렇다면 김부식을 일방적으로 매도하기는 힘들다. 이런 인물을 올렸을 때는 이유가 있을 터, 그게 뭐지?  


물론 흑치상지가 억울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있는 힘껏 분투했으나 백제가 다시 회복될 수 없었으니 어찌할 것이며, 그래도 살아야 하니 당나라를 위해 싸울 뿐 또 어찌할 수 있었겠는가? 당나라 사람들이 모함하는 데야 또 어찌할 것인가? 흑치상지 혼자 힘으로 극복하기 어려운 일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심정적으로 이해는 되지만, 뭔가 수긍은 쉽게 되지 않는다. 흑치상지가 시대적으로 그렇게 멀리 떨어진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일말의 아쉬움 같은 것이 남는다. 객관적으로 무심하게 흑치상지를 바라보기가 힘들다. 백제가 우리 민족이라는 의식 때문이다. 중국은 다른 나라이지만, 신라는 우리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흑치상지는 당나라에 죽을 때까지 대항하거나, 신라를 위해 싸우거나. 그래야 우리 마음이 편안하다. 


그러나 김부식은 흑치상지를 비난하지 않았다. 백제인으로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지 못한 흑치상지에게 명예로운 죽음이 낫다는 설교 따위를 하지 않았다. 김부식은 흑치상지 열전에서 이런 식의 애국심이나 민족의식을 전혀 개입시키지 않는다. 흑치상지는 적어도 임존성에서 백제 군사를 다시 규합해서 당나라에 최후의 저항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역부족으로 다시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 말고 흑치상지가 더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는가? 김부식은 아주 객관적으로 흑치상지의 일생을 보여줄 따름이다.  


흑치상지 개인은 매우 훌륭한 장군이었다. 병졸들이 그가 타는 말을 매질했을 때 "개인의 말에 관한 일로 나라사람을 벌하겠느냐?"라고 말하며, 병졸들을 용서했다. 그리고 포상으로 받은 물품을 남김없이 부하들에게 나눠주었다. 아랫사람에게 너그럽고 공정하며, 개인적으로는 욕심이 없었다. 백제의 장군일 때도 그랬고, 당나라의 장군일 때도 그렇게 했다. 당나라에서 억울하게 모함 당했을 때 아랫사람들은 모두 흑치상지를 안타까워했다. 

김부식은 장수 흑치상지에 주목한다. 흑치상지는 어떤 상황이건 전선에서 싸울 뿐이다. 흑치상지는 전쟁기계이다. 흑치상지는 백제의 장수일 때는 백제를 위해, 당나라의 장수가 되었을 때는 당나라를 위해 싸울 뿐이다. 아주 뛰어난 전쟁기계로 살다가 전쟁기계로 죽었다는 사실, 이것이 흑치상지 열전의 핵심이다. 


국가라는 경계는 국운과 함께 사라진다. 백제의 멸망을 당나라가 주도했고, 백제왕과 함께 백제의 유민들은 당나라로 잡혀갔다. 이들은 분명 당나라에서 백제의 유민으로 삶을 이어갔을 것이다. 만약 신라가 백제 멸망을 주도했다면 백제왕과 흑치상지는 신라에서 백제의 유민으로 살았을 것이다. 당나라에서 살아가는 이는 당나라를 위해 살 수밖에 없다. 백제의 용병은 이제 당나라의 용병으로 살아야 한다. 전쟁터에서 장수는 이기기 위해 싸워야 한다. 흑치상지가 백제 부흥운동을 주도하다 항복하고 당나라의 장군이 된 것은 30대였다. 흑치상지는 60살에 교수형을 당하는데 30대부터 60살까지 당나라의 장군으로 싸웠다. 


멸망한 나라의 장군의 최후는 한 가지가 아닐 것이다. 전쟁이 터졌을 때 싸우다 죽거나, 죽지 못하고 포로가 되었을 때는 적국을 위해 싸우거나, 도망가서 숨거나. 아마 멸망당한 백제, 고구려의 장군과 병졸들이 당나라를 위해, 신라를 위해, 혹은 돌궐을 위해 싸웠을 것이다. 그것이 전쟁 시대의 생존법이다. 


흑치상지가 당나라에 대항하기를 바라는 건, 상상의 공동체인 민족의식 때문이리라. 백제인들이라면 흑치상지가 마지막까지 백제를 위해 싸우기를 바랐을 것이다. 적군이 신라여도 그랬을 테고, 당나라여도 그랬을 터였다. 고려인 김부식 또한 오히려 그런 부분에서 민족이라는 자의식이 발동하지 않았다. 신라나 당나라나 모두 백제에게는 ‘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흑치상지가 백제의 장수로서 최후까지 절치부심했다면 그것대로 의미가 있겠지만, 살아남은 자의 최후도 의미가 있었던 것이다. 백제의 유민 흑치상지는 전쟁기계로서 최선을 다해 살았다. 멸망한 나라의 백성이 죽지 않고 사는 건, 산자의 몫이다. 이걸 변심으로 볼 수는 없는 것이다. 다만 전쟁기계는 또 다시 전쟁기계로 산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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