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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속 고구려의 폭군들 - "이것은 백성의 원수라!"

by 북드라망 2016. 8. 2.


통치자의 초상 : 정치란 무엇인가? ③
<폭군의 말로, 예외는 없다>




❙ 잔인한 모본왕의 말로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왕의 됨됨이가 기록되어 있다. 인품과 지혜를 갖춘 왕과 포악스럽고 모자란 왕. 다스려지고 다스려지지 않는 것은 이들 왕의 됨됨이에 달려 있다. 특이한 것은 포악스럽고 잔인하면서 모자란 왕들은 예외 없이 신하들에 의해 제거된다는 사실이다. 고구려는 포악한 왕을 용납하지 않았다. 이런 자는 신하들과 백성의 적일 뿐, 천하가 섬기는 왕일 수 없다는 논리가 「고구려본기」를 관통한다. 맹자가 말하지 않았는가? “잔인무도했던 하나라의 걸왕과 은나라의 주왕과 같은 통치자는 일개 평범한, 사나운 남자에 불과하므로 이들을 죽여도 모반죄가 되지 않는다.” 맹자에게 이런 왕은 마땅히 교체되어야 하는 게 정의였다. 고구려 시대, 맹자가 주장 한 바의 정치학이 펼쳐졌다.


맹자는 폭군은 신하들과 백성의 적일뿐, 왕일 수 없다고 보았다.


통치자의 자격을 갖추지 못한 자가 왕이 되면 나라가 어지럽다. 대무신왕의 맏아들인 모본왕은 사람됨이 횡포하고 어질지 못하여 나랏일을 돌보지 않아 백성들의 원망이 하늘을 찔렀다. 날이 갈수록 더욱 포악해져서 그 잔인함은 점입가경, 기상천외했다. 모본왕은, 앉을 때는 사람을 깔고 앉고 누울 때는 사람을 베고 누웠다. 만일 사람이 조금만 움직이면 가차 없이 죽였으며, 신하들 가운데 간하는 자가 있으면 그 자리에서 활을 당겨 쏘아 죽였다. 이 왕의 다음 행보는 어떠했을까? 모본왕 6년 겨울 11월, 두로가 왕을 죽였다. 정당치 못한 왕이 신하에게 죽임을 당하는 건, 수순이었다.


두로는 모본 사람으로 왕의 근신이었다. 두로는 왕을 가까이 모시면서 죽임을 당할까 두려움에 떨며 울었다. 그때 어떤 사람이 그에게 충고했다. “대장부가 어찌 우는가? 옛사람의 말에 ‘나를 사랑하면 임금이요, 나를 학대하면 원수라’ 하였다. 이제 왕이 포악한 짓을 하여 사람을 죽이니 이것은 백성의 원수라. 그대는 그를 처치하라.” 이 어떤 사람의 말은 아주 간명하다. 임금을 죽이기 위해 따로 거사를 준비하지도 않고 모의도 하지 않는다. 고뇌하거나 우물쭈물하지도 않는다. 두로는 이 사람의 충고를 행동으로 옮긴다. 두로는 칼을 품고 왕 앞으로 가서 왕을 죽였다. 왕이 제대로 살지 않으면 만민이 괴롭다. 왕은 군림하는 자가 아니다.



❙ 탐욕이 부른 화, 차대왕의 시작과 끝


수성왕을 말하기 전에 그의 형 태조대왕을 이야기해보자. 고구려 제5대 태조대왕은 7살에 왕좌에 올라 100살에 물러났다. 그리고 119살에 죽었다. 98살까지 살았던 장수왕보다 무려 21년을 더 살았다. ‘세상에 이런 일이’에 나올 법하게 드문 일이다. 어떤 학자는 몇 명의 왕 이야기를 한 명의 왕에게서 일어난 일처럼 만든 것일 수 있다고 한다. 그런지는 확인 불가능하니, 『삼국사기』의 기록을 있는 그대로 수용할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다. 태조대왕은 나면서부터 눈을 뜨고 볼 수 있었고 성숙했다고 하니, 7살에 왕위에 오른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 고구려 초. 대무신왕도 6살의 왕자시절부터 정치적 활약이 대단했으며 11살에 왕위에 오르지 않았는가?


태조대왕의 문제는 어려서 등극했기 때문에 생긴 게 아니라, 너무 오래 살아서 생겨났다. 100살까지 왕좌를 지켰으니 말해서 무엇하랴. 장장 93년의 재위기간을 자랑하는 태조대왕. 현재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은 90살이다. 26살에 왕위에 올라 지금까지 64년간을 여왕으로 군림하고 있다. 찰스 황태자는 만 68세! 호사가의 마음으로, 이러다 영원한 황태자로 역사에 기록되는 것은 아닐지, 괜한 걱정을 한 적도 있다. 그런데 태조대왕은 엘리자베스 여왕보다 더 일찍 왕위에 올라서 더 오래 왕 노릇을 한 것이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는 1952년, 26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고려의 태조대왕은 그보다 더 어린 7살에 왕위에 올라 100살까지 왕좌를 지켰다.


태조대왕의 오랜 재임으로 조정의 신하들 사이에는 다른 마음을 품은 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태조대왕 80년 관나우태 미유, 환나우태 어지류, 비류나조의 양신 등이 왕의 동생 수성을 흔들었다. 이때 왕의 나이는 94살, 수성의 나이는 70살. 동생의 나이도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이들은 왕이 늙었는데도 양위할 뜻이 없으니 수성에게 대책을 세우라고 속삭거렸다. 수성은 자신을 옹위한 지방 세력과 연합하여 왕이 될 준비를 해 나갔다.


태조대왕 86년 아우 백고가 눈치를 채고 수성에게 간하여 말했다. “재앙과 복은 오는 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그것을 불러들이는 것이다. 임금의 아우라는 근친으로 백관의 우두머리가 되었으니 충성, 의리, 예도, 겸양으로써 욕심을 억제하여 위로는 왕의 덕을 따르며 아래로는 백성의 마음을 얻어야 한다. 이렇게 한 뒤에야 부귀가 몸에서 떠나지 않고 재난이 일어나지 않는다.”


아우의 충고를 수성은 이렇게 받았다. “무릇 사람의 생각이 누가 부귀하고 환락하기를 욕망하지 않으랴마는 이것을 얻는 자는 1만 명에 하나도 없을 뿐이다. 이제 내가 향락을 할 수 있는 처지에 있으면서 제 마음대로 하지 않고 장차 무엇을 하겠느냐?” 수성은 천하를 소유하고 독점하는 자리가 왕좌라고 여겼다. 백성들의 안정을 위해 어떤 정치를 펼치겠다는 야심 따위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오직 자기 한 몸의 영달과 환락에만 집중한다. 76살에도 인간의 욕심은 팽창하면 팽창했지 결코 줄어들 수 없는 것인가 보다.


탐욕스런 수성은 기어코 왕위를 물려받는다. 태조대왕의 어진 신하인 고복장이 수성의 왕위 계승을 반대하고 그를 처치해야한다고 간언했으나, 왕은 수성이 나라에 공로가 있다는 이유를 들어 왕위를 물려준다. 태조대왕의 실제 뜻인지 알 수 없지만. 정황상 수성이 형에게서 거의 강제로 왕위를 찬탈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수성은 왕위에 오르면서 고복장을 죽이고, 태조대왕의 아들 막근을 죽였다. 태조대왕의 둘째 막덕은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수성이 왕위에 오르니 6대 차대왕이다. 이 왕의 말로는 어떠했을까? 제 명에 죽지 못하고, 신하 명림답부에게 죽임을 당했다.


흥미로운 건, 신하 명림답부도 113살까지 살았다는 사실이다. 『삼국사기』에는 명림답부의 열전이 수록되어 있는데. 명림답부는 차대왕을 죽이고 동생 백고를 왕좌에 앉혔다. 백고가 바로 신대왕이다. 명림답부는 신대왕 때 국상까지 올랐고, 한나라와의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명림답부의 공적보다 더 눈에 띄는 건, 그의 수명이다. 113살까지 살았다니, 놀랍다. 고구려 사람들이 장수했던 것인가? 기록이 잘못된 것인가? 


명림답부는 심지어 106세의 나이로 침략한 한나라 군대와의 전투에서 승리하기도 했다.


김부식은 차대왕의 왕위 찬탈에 대해 별도로 평가를 했다. “옛적에 송나라 선공이 자기 아들 여이를 왕으로 세우지 않고 자기 아우 목공을 세워 조그마한 인정으로 국가 대계를 어지럽게 함으로써 여러 세대에 환난을 가져왔기 때문에 춘추의 떳떳한 도리에 처함을 소중히 여기라 하였다. 태조왕이 의리를 알지 못하고, 중대한 왕위를 가볍게 생각하여 어질지 못한 아우에게 맡김으로써 화가 한 충신과 두 아들에게 미치게 했으니 탄식을 금할 수 없다.”


김부식은 태조대왕이 사태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인정에 얽매였다고 비판한다. 수성과 그의 세력들이 태조대왕을 압박하여 왕위를 거의 빼앗은 것으로 해석되지만, 김부식은 그보다 먼저 고복장의 충고를 듣지 않은 태조대왕의 판단력을 비판하는 것이다. 수성에게 욕심을 실현할 틈을 주어서는 안 되는데, 태조대왕이 그 길을 열어준 셈인 것이다. 누구에게 왕위를 물려줄 것인가? 참으로 예리함이 필요한 일이다. 사사로운 욕심에 취해있는 자, 결단코 왕이 되면 안된다. 이런 것을 볼 수 있는 혜안도 왕이 갖춰야 할 자질이다.



❙ 극과 극, 고국천왕과 봉상왕  


고국천왕은 “키가 9척이요, 풍채가 웅장하며 힘은 큰 솥을 들 수 있었고, 사건을 처리함에 있어서 너그러움과 날카로움을 적당히 겸비하였다.” 고국천왕은 그야말로 외모와 덕을 겸비한 왕이다. 몸과 마음은 하나! 마음이 잘 생기면 외모도 멋지다. 옛날 사람들은 마음의 덕이 풍채로 드러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위엄이 묻어나는 외모를 중시했다. 이렇게 멋진 고국천왕은 왕노릇을 제대로 수행했다.


고국천왕 때, 왕후의 인척들이 제도를 믿고 교만하고 사치하며, 토지와 주택을 멋대로 약탈하여 백성들의 원망이 하늘을 찔렀다. 왕의 측근들이 권력을 횡단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 기득권 세력인 귀족들이 앞장서서 이들을 물리칠 수 있을까? 아마도 쉽지 않을 것이다. 끈끈한 결속력과 연대의식으로 인해 자신들의 폐단을 근본적으로 혁신하기는 힘들다.


왕은 중앙 집권 세력에게서 해법을 찾아서는 안된다. 숨어 있는 인재를 발굴해야 한다. 고국천왕은 현명한 자를 기용하기로 마음 먹고 인재를 찾았다. 권력을 천단하는 무리를 몰아내기 위해 재야에서 농사지으며 사는 현량을 뽑아 쓰기로 작정한다. 권력과 거리가 먼 자, 권력에 제압되지 않은 자를 기용해야 어지러운 현실을 풀어낼 수 있다.


좋아, 을파소 너로 정했다!


그 유명한 재상 을파소가 이 때 등장한다. 을파소는 유리왕 때의 대신 을소의 손자로 압록곡 좌물촌에 살며, 성질이 굳세고 지혜가 깊으나 세상에 쓰이지 못하므로 농사를 지어 스스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어진 사람 안류의 천거를 믿고 왕은 을파소를 등용한다. 재야의 인물을 데려올 때는 파격적인 자격을 부여해야 한다. 그리하여 왕은 을파소가 일을 마음껏 할 수 있도록 국상의 자리를 내린다. 근신과 외척을 누르려면 이 정도의 권한이 아니고는 일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직위는 일에 걸맞아야 한다. 근신과 외척이 을파소를 참소해도 왕은 국상의 말에 복종하지 않았다. 그리고 신하들에게 엄포를 놓았다. 국상의 말에 복종하지 않는 자 친족까지 멸하리라! 과연 을파소는 능력 발휘를 다 할 수 있었고, 평화로웠다.


김부식을 사평을 이렇게 달았다. “옛날 명철한 제왕들이 어진 자에 대하여 처지를 가리지 않고 선발하며 등용하여 의심을 두지 않았는바, 은나라 고종은 부열에게, 촉나라 선주는 공명에게, 진나라 부견이 왕맹에게 하듯 한 뒤에야 현량하고 재능 있는 사람들이 해당한 위치와 관직에 있게 되어 정치가 개선되고 교화가 밝혀져서 국가를 보존할 수 있는 것이다. 왕이 단연히 용단을 내어 을파소를 바닷가 벽지에서 발탁함에 있어서 여러 사람들의 비방에 구애하지 않고 그를 백관의 윗자리에 등용하였으며 또한 천거한 자에게까지 상을 주었으니 옛날 임금들의 법도를 체득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통치는 영토를 넓히거나 법령을 세우거나 성을 쌓는 업적과 다르다. 정치적인 행정을 잘하는 것만이 통치는 아니다. 천하를 자신의 소유로 여기지 않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백성과 더불어 즐길 수 있는 정치를 펼쳐야 한다. 고구려는 백성을 편안하게 해준 왕에 대해서는 무한히 신뢰하고, 절대 권력을 안겨주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그 책임을 물어 철저하게 응징했다.



고국천왕과는 완전히 극에 해당하는 왕이 있다. 봉상왕. 어려서부터 교만하고 방탕하며 의심과 시기가 많았다. 왕이 된 이후, 극도로 사치하여 화려하게 궁실을 증축하며 사리사욕에만 치중했다. 이에 반해 백성들은 굶어죽고 서로 잡아먹는 끔찍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그렇지만 왕은 계속해서 토목공사를 진행하여 백성들을 피폐하게 만들기를 멈추지 않았다.


창조리가 말했다. “백성들이 살 곳이 없으므로 장정들은 사방으로 흩어지고 노약들은 개천과 구덩이에서 헤매고 있으니 하늘을 두려워하고 백성들을 걱정하여 조심하고 반성할 때입니다. 대왕께서 굶주리는 사람들을 몰아다가 토목역사로써 괴롭히는 것은 백성들의 부모로서 본의에 매우 어그러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피폐한 틈을 타서 쳐들어온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왕은 신하의 말을 건성으로 듣고 말한다. “백성들이 쳐다보는 바인데 궁실이 웅장하지 않고 화려하지 않으면 위엄과 무게를 보일 바가 없는 것이다. 국상은 나를 비방함으로써 백성의 칭찬을 구하려는 것이다.” 왕이 중시하는 것은 위세에 복종할 수 있게 하는 “두려움과 외경”의 효과이다. 물론 백성이 두려워 복종은 할 수 있지만. 지나치다보면 백성은 자연히 가 나라를 떠난다. 백성들은 자신들을 안집(安集)시켜줄 환경이 중요하다. 만약 그럴 수 없는 상황이라면 백성들은 자기 임금과 땅을 버리고 과감하게 떠나는 것이다. 백성들이 자기의 삶만큼 중요한 게 어디 있겠는가? 왕도 국가도 부차적일 뿐이다.   


봉상왕은 창조리의 간언을 듣지 않는다. 심지어 안국군 달가와 같은 공신조차 백성들이 존경한다는 이유로 의심하여 음모를 씌워 죽였다. 봉상왕의 악행은 용서받지 못한다. 결국 왕은 창조리에게 죽임을 당한다.


김부식은 논평했다. “좋은 약이 입에는 쓰지만 병에는 이롭고 바른말이 귀에는 거슬리지만 품행에는 유익한 것이다. 그러므로 옛날 명철한 임금들은 자기 태도를 겸허하게 하여 정사를 물으며, 간하는 말을 하지 않을까 염려하여 낯빛을 부드럽게 하며, 신소할 때 칠 수 있는 북을 달며, 비방하는 말을 기록하게 하는 나무를 세워 온갖 조치를 다 취했다. 이제 모대왕은 간하는 글이 올라와도 반성하지 않고 다시 문을 닫아 거절하기까지 했다. 장자는 말하기를 ‘허물을 알고 고치지 않으며 간하는 말을 듣고도 더욱 심하게 구는 것을 한악하다고 한다’라고 했으니 모대왕을 두고 이른 말일 것이다.”


김부식은 왕이 신하와 백성들의 소리에 겸허하게 귀 기울여, 좋은 말은 더욱 힘쓰고 비방의 말은 고쳐야 한다고 보았다. 이래야 나라가 잘 다스려졌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왕은 자기 안에 갇혀서는 안 된다. 사심으로 막혀 있어서도 안 된다. 실수는 할 수 있다. 다만 실수를 실수로 알고, 인정하고, 고치면, 왕노릇할 수 있는 덕목을 갖춘 것이다. 중세의 역사가 김부식이 주목하고 중시한 것은 통치자의 자질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자질은, 백성들을 천하로 여기며 이 마음을 정치로 실현하는 것이다. 맹자는 말했다. 백성들이 왕의 동산에서 나무하고 토끼‧돼지를 잡을 수 있으면 사방 70리의 동산도 작다할 것이라고. 만약 혼자만 독점한다면 사방 10리의 동산도 크다할 것이라고. 백성들을 구하고자 한다면 왕은 오히려 국가조차 버릴 수 있어야 한다. 왕의 마음을 알면 국가를 버렸어도 백성들은 따라온다. 오직 백성의 그 헐벗은 생명을 직시하는 게 중요하다. 공생을 생각하지 않는 왕은 전쟁으로 땅을 넓혀도 제도를 잘 만들어도 좋은 왕일 수 없다.


우리는 역사에서 무엇을 읽는가? 문명의 정도? 앞서가는 문명의 이기들을 부족함 없이 누릴 때 제대로 잘 다스려진 사회인가? 한 사람도 추방되거나 소외되지 않고 민주주의가 실현될 때 잘 다스려진 사회인가? 통치자 한 사람의 권력이 만민을 휘두르던 시대를 훌쩍 뛰어넘어 만민이 주체가 되는 사회에 살고 있다. 말로는 그렇다. 그리하여 만민도 자격을 갖춰야 한다. 통치자의 어리석음을 넘으려면 대중이 어리석으면 안 된다. 삼국시대는 통치자가 잘 다스리면 만민이 평안하고 천하가 즐거웠다. 그러나 지금은 통치자 한 사람이 만민을 커버할 수 없다. 만민 한 사람, 한 사람의 행동과 지성이 세상을 좌우한다. 통치자의 어리석음과 대중의 어리석음이 결합하는 순간, 혼란이 야기된다. 그러니 대중은 깨어 있어야 한다. 통치자의 자질이 이제는 대중의 자질이 되었다. 대중이 현명해야 하는 시대이다. 예전 통치자의 자질을 대중도 갈고 닦아야 한다. 그래야 정치가 제대로 펼쳐진다.



글_길진숙(남산강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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