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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백수는 고전을 읽는다

부모님을 갈구는 것도 효도다?!

by 북드라망 2012. 3. 19.
효(孝), 그 거침없는 개입의 삶

류시성(감이당 연구원)

子游問孝 子曰 今之孝者 是謂能養 至於犬馬 皆能有養 不敬 何以別乎(爲政 7)
자유문효 자왈 금지효자 시위능양 지어견마 개능유양 불경 하이별호

자유가 효(孝)를 묻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지금의 효(孝)라는 것은 ‘물질적으로’ 부모를 잘 부양하는 것만을 일컫는다. 그러나 개와 말도 모두 길러줌이 있으니, 공경하지 않으면 무엇으로 구별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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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롭게도『맹자』엔 이 문장을 고스란히 재현하는 에피소드가 하나 등장한다. 더 흥미로운 건 그게 증자(曾子)에게 벌어진 일이라는 점이다. 증자(曾子)가 누구던가. 효(孝)의 대명사로 알려진 그가 아니던가. 그런데 그에게 대체 무슨 일이? 사태의 시작은 증자가 증석(증자의 아버지)을 봉양할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효자로 소문난 증자. 그는 아버지를 봉양할 때면 항상 술과 고기를 준비해서 상에 올린다. 먹고살기도 빡빡한 시대에 그야말로 지극 정성이 따로 없었던 것. 상을 물릴 때도 그냥 물리는 법이 없다. 꼭 이렇게 묻는다. “남은 것을 누구에게 줄까요?” 남은 게 있으면 굶주린 사람들에게 베풀려는 이 아름다운(?) 마음.^^ 더구나 증석이 더 있냐고 물으면 증자는 ‘으레’ 더 있다고 답한다.(사실 남은 게 별로 없었을 게 분명하다. ‘으레’라는 말에서 그런 뉘앙스가 아주 강하게 풍겨온다.)

하지만 좋은 시절도 잠깐. 증석이 죽자마자 사태는 비극으로 치닫는다. 이번엔 증자가 그의 아들 증원으로부터 봉양을 받을 차례. 그런데 증원의 태도가 좀 거시기하다. 일단 증원도 증자처럼 술과 고기는 준비한다. 하지만 그게 전부다. 증자처럼 남은 건 어떻게 할지 절대 묻지도 않는 이 자식. 심지어는 증자가 더 있냐고 물으면 으레 ‘없다’고 답하는 이 자식. 이유는 간단하다. 다음 상에 남은 술과 고기를 또 올리기 위해서란다.(헉!)『효경』(孝經)의 저자로 알려진 증자에게 어느 누가 이런 말 못할 사연이 있으리라고 짐작이나 했겠나. 아버지를 극진히 모신 보답으로 돌아오는 게 자식에게 철저하게 배반당하는 것이라니! 그러니 이래저래 인생은 참으로 무상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증원의 마음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아버지에게 술과 고기는 대접해 드리고 싶은데 그렇다고 넉넉한 하지 못한 상황. 이 처지에 증원에게 달리 무슨 방도가 있었겠나. 끼니를 때우지 못해서 굶어죽는 사람들이 천지에 나뒹구는 판에 내 부모 하나 잘 챙겨드리는 게 무슨 잘못이란 말인가. 이 점에 있어서는 우리도 증원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맹자는 이런 증원의 마음을 맹비난한다. 그건 입과 육체의 봉양(養口體)일 뿐이라고. 공자의 말마따나 개나 말을 기르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사실 맹자의 이 말은 좀 당돌하다. 왜냐고? 맹자는 증자 계열의 유학자였으니까. 맹자는 스스로 증자의 제자이자 공자의 손자였던 자사(子思)로부터 배웠다고 말하고 다녔으니까. 그러니 당연히 증자를 까면 깔수록 자기의 정통성도 같이 흔들리게 될 것은 불 보듯 뻔하지 않겠나. 하지만 맹자는 참지 않는다. 마치 현장을 목격이라도 한 것처럼 증자(曾子) 집안의 치부를 폭로한다. 그만큼 증원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이 에피소드의 마지막. 맹자는 일격을 가한다. ‘증자라면 증석의 뜻을 봉양했을 것이다.’ 즉, 증원은 증자의 뜻을 눈꼽 만치도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 맹자가 분노했던 건 바로 이 어리석음에 있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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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것도 마찬가지지만 ‘효’에 대한 오해도 상상 이상이다. 물질적 봉양만이 오해를 불러오는 게 아니다. 복종과 의무로 孝를 규정하는 것도 그 오해 가운데 하나다. 아버지의 뜻을 봉양해야 한다는 맹자의 말이 오해될 수 있는 것도 이 맥락에서다. 하지만 孝를 복종-이데올로기로 보는 건 오해 중의 오해다. “아버지가 아무리 난폭하고 어리석더라도, 자식에 대한 애정이 없더라도, 자식은 지상명령으로 아버지에 대한 애정을 가져야 한다. 그런 식의 이해가 유학적인 것, 혹은 『논어』적인 것으로 행세하고 있습니다.” 즉, 아버지가 아버지로서 역할을 다하지 못할 때도 복종하는 것, 그건 孝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럼 孝란 물질적 봉양도 아니고 복종도 더구나 의무도 아니라면 뭐란 말인가.

공자는 이 문장에서 孝를 경(敬)으로 정의한다. 그런데 경(敬)은 우리가 알고 있는 ‘공경’보다 훨씬 넓은 차원에서 작동하는 개념이다. 후대의 일이긴 하지만 송대 유학자들은 이 ‘敬’을 이렇게 의미화한다. 주일무적(主一無適). 마음을 한 군데 두고 흩어지지 않게 한다. 늘 하나에 집중해서 전념을 다한다. 그래서인지 송대 유학자들은 이 ‘敬’을 수양의 방법으로 극히 강조했다. 즉, 존재가 자신의 모든 걸 걸고 자신을 보다 나은 인간으로 밀고가려는 의지. 이게 곧 경(敬)이라는 말이다. 공자가 효(孝)를 경(敬)으로 봤던 이유도 이와 다르지 않다. 사사로운 마음을 없애고 부모를 생각하는 마음. 부모를 봉양해서 유산이나 받아볼까 하는 마음을 갖거나 부모니까 억지로 봉양해야 한다는 당위를 넘어서 존재의 무게중심을 지금 이 관계에 두는 작업. 공자가 생각한 孝란 바로 이런 모습이다. 허나 말이 쉽지 어디 이게 일상에서 行해지기 쉬운 일이던가. 하지만 공자에겐 이것만큼 중요한 문제도 없다.

공자에게 가(家)는 ‘덕(德)을 쌓는 첫번째 학교’다. 인간이 덜 된 사람들에게 아직도 가정교육이 어쩌니 저쩌니 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하지만 ‘家’에서 쌓은 덕은 ‘家’에 머물러 있어서는 곤란하다. 인간이란 자기 가족들 하고만 관계 맺고 살아가는 동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효’가 부모-자식 간의 관계에서 점차 확장되어야 하는 것도 이 고민에서다. 그래서 ‘효’엔 언제나 세상에 나가 부모를 대하듯 백성을 대하는 문제, 백성의 부모답게 왕이 처신해야 한다는 논리가 따라다녔다. 나아가 이건 우주적 차원으로까지 확장된다. 나 이외에 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것들과 나는 어떻게 관계 맺으며 살아갈 것인가. 이 고민의 출발이자 시작이 바로 부모-자식 관계에 있다는 것. 인간이라면 누구나 태생적으로 갖고 태어날 수밖에 없는 이 생물학적 관계로부터 우주적 관계를 여는 지혜를 얻으라는 것. 공자나 맹자가 효는 봉양의 차원이 아니라고 그렇게 소리 높여서 말했던 이유다.
 
그런데 여기에 하나의 문제가 있다. 부모와 내 뜻이 맞지 않을 때 그럼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인가.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 되는 기초라곤 하지만 일단 뜻이 맞아야 할 거 아니냔 말이다. 이 현실적 고민에 대한 공자의 처방은 아주 흥미롭다.

子曰 事父母 幾諫 見志不從 又敬不違 勞而不怨(里仁 18)
자왈 사부모 기간 견지부종 우경부위 노이불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부모를 섬기되 부드럽게 간(諫)해야 하니, 부모의 뜻이 내 말을 따르지 않음을 보고서도 더욱 공경하여 (부모의 뜻을) 어기지 않으며, 힘들더라도 원망하지 않아야 한다.

결론은 그래도 부모의 말을 따라야 한다는 것. 하지만 오히려 주목해야 할 건 부모에게 간(諫)한다는 측면이다. 부모의 뜻과 내 뜻이 서로 달라서 충돌할 땐 ‘자식된 도리’로 최대한 ‘부드럽게’ ‘지속적으로’ 간언해하라는 것.^^(방점은 물론 ‘부드럽게’에 콕 찍혀 있다.) 사실 공자가 ‘간’(諫)이라는 단어를 쓰는 문장을 보면 대부분 너무 많이 간하지 말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친구에게 너무 자주 충고하면 친구가 삐지고 군주에게 너무 자주 간언하면 목숨이 위태로운 법이니까. 하지만 유독 부모에게는 아주 끊임없이 간언하고 충고해야 한다고 말하는 공자. 그게 자식의 ‘의무’라고 말하는 공자. 부모-자식 관계는 인륜(人倫)으론 끊어지는 게 아니니 마음 놓고 서로의 삶에 꾸사리(?)를 주라는 공자.
 
사실 공자가 생각한 ‘효’의 핵심은 바로 여기다. 즉 부모-자식 간의 끊임없는 개입. 부모가 어떻게 살든 그냥 부모는 부모대로 자식은 자식대로 살아가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 서로의 삶을 향해 조언할 수 없는 관계는 ‘사육’이나 다름없다는 것. 다른 관계들도 마찬가지다. 내가 누군가와 함께 살아가려면, 그리고 그들과의 관계에서 내 삶이 보다 나은 삶이 되려면 우리는 그들을 갈궈야 한다.^^ 그들의 삶을 찌질한 국면에서 벗어나도록 만들어야 한다. 왜냐하면 관계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에겐 그 관계가 곧 자신의 삶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에 우리를 또다시 깊은 절망으로 몰아가는 질문이 버티고 있다. 그렇다면 서로가 서로에게 삶의 방향을 제시해 줄 비전을 갖고 있는가. 부모가 자식에게 자식이 부모에게 뜻을 알아 달라고 말할 만한 삶의 비전이 있던가. 효(孝)가 복종이니 봉양이니 하는 오해에서 벗어나려면 이 문턱을 반드시 넘어야 한다. 그렇지 않은 시대의 가족이 어떤 모습인지 우리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지 않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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