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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나의 삶, 나의 글, 리좀

사랑하지 않는 삶은 앙꼬없는 찐빵!

by 북드라망 2012. 3. 13.
사랑은 자의식이 아닌 무의식이 한다

김해완(남산강학원 Q&?)

연애를 안 하는 (혹은 못 하는) 이유

사랑이란 무엇인가. 예전 같았으면 그럴 듯한 답을 만들어 내며 어떻게든 질문에 대한 예의라도 갖추려고 애썼을 테지만, 지금은 그냥 찌질한 것이라고 답하겠다(-_-;). 고상한 질문에는 고상한 답이 가야 하지만 나는 그럴 수가 없다. 거짓말이기 때문이다! 나를 포함하여, 내가 지나쳐 온 여러 청춘들의 연애사는 대체로 한심하기만 했다. (ㅠㅠ) 유치한 이벤트, 섹스에 대한 애매함, 주위 사람들에 대한 눈치, 학벌의 열등감, 연인 사이의 권력관계, “내가 더 중요해 걔가 더 중요해?”와 같은 말싸움……. 그런 데에 계속 치이다 보면, 마침내 최초의 꽃잎 100개 날리던 떨림은 온데간데없고, 뭐 하나 제대로 해보지도 못한 채 사랑이 끝나 버린다. 연애를 하고 싶어 했던 (여전히 하고 싶어 하는!) 나에게 회의하기를 수십 번. 좋은 상대를 만나야 하나? 뭐가 문제지? 배짱도 시간도 돈도 없는 내가 또 이걸 할 수 있을까? 해서 뭐 하나? 그렇게 묻기만 하다가 봄날이 다 간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초속 5cm」스틸컷


오늘도 나는 언젠가 이 한심한 연애수준으로부터 구해 줄 근사한 반쪽을 꿈꾸거나, 그런 건 세상에 없고 나의 연애도 없다고 이상한 냉소(?)를 하거나, 그 사이에서 갈팡질팡한다. 멜로드라마가 허상인 것도 알겠고 청춘연애가 찌질하다는 것도 알겠는데 그럼 도대체 나는 어쩌란 말인가. 이러니 사랑이란 이런 것이라고 암만 아름답게 정의해봤자 아무 소용없는 것이다. 내가 사랑할 수 있는 곳은 답답하고 안 풀리는 현실, 바로 여기뿐이니까 말이다.

“나는 너를 사랑해”의 세 가지 버전

물론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사랑하기를 멈추는 것은 아니다(^^). 나의 깊은 탄식에도 불구하고 남산산책로와 명동 거리에는 커플들이 차고 넘치고 흐른다! 어떤 상황에서든 연애도 연애를 갈구하는 마음도 계속된다. “I Love you” 라는 대사는 여전히 우리의 가슴을 떨리게 하는 것이다.

『천 개의 고원』 식으로 말한다면, 이 말에는 세 가지 버전이 있다. 일상적인(?) 예시로 보자. 먼저, 내가 너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경우. 이 사회 안에서 “너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밟아야 할 일정코스가 있다. 그것은 ‘사랑’에 본질적 의미가 존재한다고 부추기는, 또한 거기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이러저러한 길로 가야 한다고 명령하는 사회적인 장치들 때문이다. ‘사랑’을 둘러싸고 형성되는 사회적 배치. 그렇게 우리는 프러포즈를 하고, 데이트를 하고, 기념일을 챙기는 것이다. 두번째 버전. 내겐 오직 너뿐이라고 부담스러울 정도로 온 존재(!)를 들이대는 경우. 사랑밖에 난 몰라~ 불타오르는 열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부르는 이 ‘미친 사랑의 노래’를 종종 우리는 진실하다고(-_-;) 평가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나’와 ‘너’의 정체성을 설정하고 그 둘을 일치시키려는 시도다. 네가 나라는 주체를 (혹은 그 역의 경우) 세우는 기준점으로 되는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이 두 가지의 경우로는 포착할 수 없는 ‘사랑’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분류하는 몇 개의 감정들, 의례들로는 도저히 붙잡을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혹은 ‘나’나 ‘너’라는 경계마저도 중요치 않아질 수 있다. 혹시 이상한 경지(?)에 대해 말하려 하는 게 아니냐고 성급하게 의심하지 않기 바란다. 실제로 세상에는 많은 종류의 사랑이 있다. 에로영화보다 더 뜨겁게 스승님의 지성을 쫓아가는 제자, 기원 전 지중해에 살았던 철학자에게 평생 러브레터를 쓰는 철학도, 사료더미에 묻혀 있었던 600년 전의 촌사람들에게 푹 빠지는 역사가, 사모님보다 난초에게서 더 큰 애정을 느끼는 사장님, 곰이 곧 나라고 말하는 인디언들까지. 여기에는 사랑에 대한 일반적인 통념이나 너와 나를 강조할 만한 자리가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 관계 속에서 뜨겁고 충만한 에너지를 느낀다.

“나는 너를 사랑해.” 만약 우리가 이 말을 최초로—일반적인 사회적 통념에서 벗어나 고유한 의미로서—했다면, ‘나’나 ‘너’라는 경계가 별로 중요해지지 않는다면 그것이 바로 세번째 버전이다. 여기서 사랑한다는 것은 곧 접속한다는 뜻이다. 뭔가와 마주쳤을 때 벌어지는 사건! 따라서 사랑한다는 것에는 본질적인 의미나 감정상태, 인간관계가 고정되지 않게 된다. 마주침이라는 광범위한 사건의 에너지가 어떤 때는 ‘사랑한다’는 언표로, 혹은 사랑이 아닌 형태로(그때는 ‘느낀다’는 언표를 쓸 것이다) 포착되는 것일 뿐이다. 이게 바로 평범한 남녀관계에서조차도 하나로 규정될 수 없는 수만 갈래의 감정과 국면이 존재하는 이유다.

중요한 건 이 세 가지 버전들이 모두 동시에 공존한다는 점이다. “나는 너를 사랑해.” 이 말에는 사회적인 표상들과 고립된 관계와 순수한 떨림이 뒤섞여 있다. 하지만 일차적인 것은 역시 세번째여야 한다. 맨 처음 사랑에 빠졌을 때 그 생동감은 어디서 올까? 그것은 특정한 절차를 거치거나 혹은 ‘너’를 소유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낯선 것이 내 안으로 침투해 들어왔다는 실재적인 사건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짝사랑할 때, 상대를 보기만 해도 내 안에서 폭풍과 같은 기쁨을 느끼는 것처럼. 굳어진 감정회로와 관계형식 안에서 그래도 사랑을 생생한 것으로 만들어 주는 힘. 그게 에로스다. 그렇다, 바로 여기에 나의 고뇌가 나아갈 출구가 있을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허니와 클로버』의 한 장면



사랑, 무의식의 바다 위에서

시선을 조금만 바꿔 보면 우리들 연애사(事)에도 충분히 경이로운(?) 일들이 존재한다. 이렇게 보잘것없는 내가 역시 보잘것없는 너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 이거야말로 천지가 개벽할 만큼 이상한 사건 아닌가(ㅋ). 사랑에 빠지는 순간 우리는 상대방의 행동 하나하나가 마치 자신이라도 된 마냥 생생하게 느낀다. 나 하나로도 벅찼던 좁디좁은 내면이 확 넓어지고, 그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낯선 것들을 감각하게 된다. 나에게 이런 놀라운 능력이 있다니! 느낀다는 건 단순한 반응이 아니다. 무언가를 느낀다는 것은 나와 너, 여기서 더 확장해보면 나와 세상(내부와 외부) 그 사이에서 벌어지는 사건인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는 수밖에 없다. 나라는 인간의 어느 차원에서는 내가 감지하지 못하는 수많은 외부성이 우글거리고 있다고 말이다. 감각의 블루오션! 낯선 것과 접속하는 지대, 느낌이 발생하는 지대가 바로 이곳이다. 『천 개의 고원』 버전으로 말하면 바로 ‘무의식’이다. 이때 들뢰즈/가타리가 정의하는 무의식은 프로이트의 개념과 팔팔결 다르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이 이러저러한 메커니즘(오이디푸스 콤플렉스)으로 억압받고 있다고 생각했고, 그곳에는 차마 맨 정신으로는 직시할 수 없는 엽기적인 욕망이 들끓고 있다고 보았다. 반면, 우리 저자들의 무의식은 오직 생성할 줄만 안다. 그곳은 ‘나’가 아닌 온갖 것들로 북적댄다. 너와 내가 구별되지 않고 오직 ‘강렬도’만이 흘러간다. 이게 바로 내가 어떻게 (내가 아닌) 너를 ‘실제로’ 느낄 수 있는지에 대한 비밀이다. 무의식만이 기꺼이 타자를 받아들일 수 있는 역량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무한한 바다를 한 개씩(?) 가지고 살아가는 셈이다.

사랑하는 순간에 우리에게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지난 글에서 다양체(multiplicity)에 대해 말했다. 세상 모든 것들은 다양함 그 자체로만 존재할 수 있다고 말이다. (느낀다는 것은 내가 다양체라는 명백한 증거다*-_-*) 그런데 내가 너를 사랑하게 되는 순간, 나는 ‘다양체의 다양체’(!)가 된다. 사랑에 빠지는 순간을 생각해 보자. 아무렇지도 않았던 사람이 왜 저렇게 환해지는 걸까. 나의 무의식이 상대로부터 ‘환원 불가능한’ 뭔가를 감지했기 때문이다. 상대조차 알지 못하는, 그의 무의식 속에 서식하고 있는 고유한 무리들 혹은 하나의 세계.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토마시가 테레자와 함께 하기 위해 모든 것을 버렸는데도 행복할 수 있었던 것은, 사랑만이 전부였기 때문이 아니라, 그 여정 위에서 스스로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테레자로부터 일어났지만 또한 테레자로 귀속될 수 없는 별개의 사건이다. 이런 게 바로 다양체의 다양체다. 다른 존재가 된다는 것. 그것은 닫혀 있었던 나의 어떤 부분이 일깨워졌다는 것, ‘나’라는 고유명에 이질적인 흐름이 관통해 간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에로스란 상대가 내게 주는 것도 아니고 내 안의 도착적인 욕망도 아니다. 그것은 사랑하는 만큼 ‘나’가 외부로 활짝 열리기 때문에 만들어지는 에너지다. 사랑한다는 것은 ‘무의식의 생성’이다. 너의 무의식에 접속하는 순간 나의 무의식은 출렁거린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언제나 군중 속에서 한 사람을 포착해내고 그가 속해 있는 집단에서 그를 가려낸다는 것. …… 그 사람에게 고유한 무리들을 찾아내고 그가 자기 안에 가두어놓고 있는, 아마 완전히 다른 본성을 가졌을 그의 다양체들을 찾아낸다는 것. 그것들을 내 것에 결합시키고 내 것들 속으로 그것들을 관통하게 만들고 또한 그 사람의 것을 관통해간다는 것. …… 이 탈개인화의 지점이 가장 높은 지점에서 비로소 누군가가 명명될 수 있…다.

─들뢰즈·가타리,『천 개의 고원』, 76쪽

물론 평소에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지 못한다. 우리는 여전히 ‘내’가 ‘너’를 ‘어떻게 한다’(사랑한다?)고 생각하는 것에 더 익숙하다. 무의식이 바다라면 우리는 그 위를 자의식이라는 배를 타고 나아간다. 결국에는 나의 내면과 너의 내면이 분리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무의식이 끊임없이 증식하고 움직이는 리좀이라면, 자의식은 그 흐름을 고정시키고 실체를 부여하는 나무와 같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랑은 서로를 보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같은 곳을 보는 것이다. 그래야 나란히 걸어갈 수 있으니까. 함께 가노라면 서로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된다. 호흡과 리듬, 습관과 동선, 마음의 행로 등등. 그런데 어디론가 가기 위해선 끊임없이 질문을 던져야 한다. 질문의 크기가 열정의 강도를 결정한다."
—고미숙, 『사랑과 연애의 달인 호모 에로스』, 212쪽


그러나 자의식과 무의식은 무 자르듯이 딱 잘라 구별되지 않는다. 세 버전의 사랑이 서로 분리불가능 했던 것처럼 말이다. 모든 것이 복합적으로 작동하는 실제 현장에서는, 오직 배치(arrangement)와 배치의 만남만이 있다. “특정한 순간에 <나는 너를 (또는 다른 무엇을) 사랑한다>라는 언표를 생산하는 배치물을 형성하기 위해 개입하는 기계들, 톱니바퀴들, 모터들, 요소들”(같은 책, 77쪽). 배치라는 개념은 재미있다. 그것은 자의식과 무의식, 감각과 물질세계의 구별 없이 모두 폭넓게 걸쳐 있다. 만약 누군가가 미쳤다면, 그것은 그가 미치지 않고서는 살 수 없는 배치 위에 있기 때문이다. 만약 누군가와 사랑에 빠졌다면 마찬가지로 내가 그럴 수밖에 없는, 기존과는 ‘새로운’ 배치로 진입했다는 뜻이다. ‘사랑’이라는 기존 사회적 배치가 엄연히 견고하게 존재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로 하여금 “사랑해”라는 말을 하게 만드는 것은 그 위에서 벌어지는 접속들, 증식되는 무의식, 배치의 전환이다.

그러니까 상대방이 너무 잘났다거나 내 자의식이 허락했기 때문에 사랑에 빠지는 게 아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기존의 배치에 변환이 온다는 뜻이다. 나와 네가 만나서 형성되는 새로운 배치, 그 꿈틀거림 속에서 우리는 증식하는 무의식을 느낀다. 그것이 아무리 미미한 움직임이라도 우리는 그것을 놓치지 않는다. 별 볼 일 없는 사랑의 순간에 찾아오는 환희는 바로 이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환자

요즘 우리 세대를 일러 삼포세대(연애포기+결혼포기+출산포기)라고 부른다고 한다. 수치스럽긴 하지만 딱히 반박할 말도 없는 게 현실이다(^^;). 연애는 시시한데 결혼은 미친 짓이니까 말이다. 가족의 영토를 벗어날 수도 그렇다고 안주할 수도 없는, 우리들의 폼 안 나는 사랑.

그러나 언제나 나를 놀라게 하는 것, 그것은 무의식이 그런 것들에 개의치 않고 생성된다는 사실이다. 이 판은 언제든 뒤집어진다. 어쩌면 우리는 ‘사랑’이라는 것의 용법을 너무 좁게 쓰고 있는 게 아닐까? 우리는 살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접속해야 하고, 그 안에서 늘 뭔가를 ‘증식시킨다.’ 그게 바로 사랑이다. 가족이든, 애인이든, 선생님이든, 책이든, 식물이든, 늑대든, 혹은 전지구적 생명이든. 한숨이 푹 나오는 이 현실을 탈피하는 첫번째 걸음은 바로 내가 열심히 사랑하는 것이다. 삼포세대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모든 것을 시시하게 만들어버리는 자본마저도 잡아먹지 못할 정도로 나의 무의식을 춤추게 하는 것이다. 그 순간은 근사하지는 않아도 아마 찌질하지는 않을 것이다(^^). 내 삶 속의 사건들.

왜 사랑해야 하는가. 답은 간단하다. 사랑하지 않는 삶은 앙꼬 없는 찐빵이기 때문이다(ㅋ). 말라비틀어진 나무를 보고 살아 있다 말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살아 있다는 것은 느낀다는 것이다. 혹은, 느낄 수 없다면 살아 있다고 하기 힘들다. 지금-여기에서 힘껏 살고 있다면 우리는 늘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포기하지 말자. 삼포세대? 연애+결혼+출산은 포기했을지 몰라도, 사랑만큼은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_-*

사용자 삽입 이미지「하울의 움직이는 성」스틸컷


천 개의 고원 - 10점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지음, 김재인 옮김/새물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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