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역사 속의 김부식 - 위대한 역사가에서 치졸한 사대주의자까지


중세 보편주의 지식인,

김부식영광과 오욕



“김씨는 대대로 고려의 큰 씨족이 되어 전사(前史)로부터 이미 실려 오는데, 그들이 박씨(朴氏)와 더불어 족망(族望)이 서로 비등하기 때문에, 그 자손들이 문학(文學)으로써 진출된 사람이 많다. 부식은 풍만한 얼굴과 석대한 체구에 얼굴이 검고 눈이 튀어 나왔다. 그러나 널리 배우고 많이 기억하여 글을 잘 짓고 고금 일을 잘 알아, 학사(學士)들에게 신복(信服)을 받는 것이 그보다 앞설 사람이 없다.”

- 『고려도경』


고려 인종 때 사신으로 왔던 송나라의 서긍 (徐兢)은 『고려도경』이란 책에서 김부식의 인물됨을 이와 같이 기록했다. 고려의 일개 접반사였던 김부식은 서긍에게 매우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모양이다. 김부식의 화상까지 그려서 황제에게 바치고, 그의 세가와 인물됨을 기록으로 남기기까지 했을 정도니 말이다. 서긍 덕에 김부식은 송나라에 널리 알려지게 된다.


서긍의 묘사에 의하면, 김부식은 ‘풍만한 얼굴에 석대한 체구에 검은 피부, 튀어나온 눈’으로 거의 『삼국지』의 장비를 연상시키는 외모를 지녔다. 선입견일 수 있지만, 김부식은 완벽한 무장의 외모를 지녔다. 서긍도 그렇게 받아들인 것 같다. 김부식의 매력은 무장의 외모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박학하고 깊이 있는 지식이었던 듯하다. 김부식은 묘청의 난을 진압한 무장으로서 전략이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고려 최고의 지식인으로 중국 고문에 정통하고, 중국 고금의 역사를 꿰뚫고 있었다. 범상치 않은 외모에 이 외모로부터 상상하기 어려운 학식. 그야말로 김부식은 문무를 겸비한 지식인이었던 것이다. 서긍이 고려의 접반사 김부식에게 반했던 이유는 이 때문이었으리라.


송의 사신은 장비를 연상시키는 외모에 중국 고문에 정통한 ‘갭’에 반한 걸지도...


김부식이 활동했던 시대는 무신과 문신의 차별이 없었다. 관리들은 전형적인 무관이거나, 아니면 문무를 겸비하거나 둘 중의 하나였다. 김부식은 문무를 뛰어나게 겸비한 고려시대 관료의 전범이었다. 김부식의 생애는 더할 나위 없이 명예로웠다. 고려 조정에서 대활약을 하며 송나라에까지 이름을 알리고, 조정에서 물러나서는 『삼국사기』 편찬으로 영광스럽게 생을 마감했다.


김부식의 시대는 중국의 문화가 동아시아 세계의 문명을 주도했다. 중국이라는 거대 제국의 책, 문장, 사상, 제도는 동아시아 주변국들의 수준을 가늠하는 척도였다. 제국이 되기 위해 중국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흡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려가 중국으로부터 책을 얼마나 많이 수입하고 재빨리 수용했는지, ‘소동파’는 고려로 책 수출하는 것을 금지해야한다고 건의할 정도였다. 이런 문화수입을 (140, 140, 140);">모화(慕華), 사대라고 무조건 밀어부치기는 어렵다. 문화의 보편화 과정이라는 관점에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고려는 중국 송나라에 대해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종속되지 않았다. 당시의 보편문화를 중국이 주도하고 있었기 때문에 ‘중국’의 선도적 문명을 수입했던 것이다. 고려는 중국 제국에 버금가는 문화적, 제도적 발전을 민족의 긍지로 여겼다. 김부식은 그런 시대의 전형적인 지식인이다.


그러나 『삼국사기』의 운명이 그렇듯, 김부식 개인의 운명도 묘하기 짝이 없다. 살아서는 문장과 학식으로 이름을 떨치고 묘청의 난을 진압하여 정치적으로 승리했지만, 김부식 사후 그에 대한 후대인들의 평가는 매우 가혹하다. 살아 영광 죽어 오욕, 살아 승리 죽어 패배는 김부식을 두고 한 말이 아닐까 싶다.



1. 정치인 김부식 : 묘청과의 대결


김부식이 활동하던 고려 인종 연간은 나라 안팎으로 어지러웠다. 1125년엔 중국 북방에서 발흥한 여진족이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금나라를 세운다. 1126년엔 예종과 인종의 장인 이자겸과 그 일파 척준경이 군사를 발동하여 대궐을 침범하고 궁궐을 불태운다. 이자겸의 난으로 왕권은 약화되고, 강대해진 금나라는 고려를 압박해왔다.



급기야 조정의 관료들은 금나라를 섬기는 문제로 의견이 엇갈리게 된다. 왕권을 제압했던 이자겸과 척준경은 금나라의 군사력이 날로 강대한데다 국경이 인접한지라 고려의 안녕을 위해서는 금나라와의 화친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관료들은 금나라를 섬기는 데 반대했다. 국가 대사에 관한 의견이 팽팽하게 맞서는 상황에서 조정에서는 금나라와의 정치․외교 문제를 태묘에 고하고 시초점에 의거하여 결정하게 된다. “우리나라는 금나라와 연접되어 있는지라 사신을 보내어 강화를 하고 싶기도 하며 혹은 군사를 훈련하여 방비 대책을 취하려고도 생각하여 이를 판단하기 위하여 점을 치는 것이니 신이여 해결책을 명시하시라.” 대부분의 신료들이 반대하는 상황에서 이자겸을 비롯한 문벌귀족들은 일방적으로 금나라와의 화친을 강행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이자겸이 실권을 쥐고 흔들던 이 때 점괘는 당연히 금나라를 섬기는 쪽으로 해석되었다. 이에 고려 조정은 금나라에 신(臣)이라 칭하는 표문을 보내어 작은 나라로서 대국을 섬기는 예를 갖추게 된다.


이자겸의 전횡은 외교문제에 그치지 않았다. 얼마 후 이자겸은 군사를 보내 왕을 죽이려 했으나, 인종이 비밀리에 척준경을 매수하여 장인 이자겸을 잡아 가두게 한다. 인종은 실권을 되찾고 이자겸과 그 무리들을 귀양 보냈고, 이후 서경 (평양)의 귀족세력인 정지상의 상소로 척준경마저 유배를 보낸다. 그러나 중앙 (개경)의 문벌 귀족들은 조정의 실세로서 여전히 왕권을 제압했다. 이 시기 김부식은 어사대부 추밀원 부사로 있으면서 중앙의 문벌귀족을 이끄는 중심 세력으로 활약했다.


이러한 와중에 송나라는 고려와 연합해 금나라를 소탕하려고 절치부심하고, 금나라는 송나라를 견제하고자 고려에 대해 계속적으로 압력을 행사했다. 고려는 약소하고 고립된 나라로써 금나라와는 화친 관계를 유지하면서, 송나라에 대해서는 경제적․문화적 필요와 금나라를 견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친교를 지속시켜 갔다. 인종은 금나라와 송나라를 견주며 줄타기 외교를 펼쳤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고려 조정은 두 파로 갈리었다. 중앙의 문벌 귀족들은 금나라와의 화친을 고수하였고, 서경 중심의 지방 세력들은 금나라를 정벌하자는 강경한 입장을 내세웠다.


인종은 중앙의 문벌귀족과 지방의 귀족 세력을 저울질하며 약화된 왕권을 회복하기 위한 파워 게임에 고심했다. 이 때 서경의 귀족세력들이 지세가 쇠한 고려의 수도 개경을 떠나 기운이 왕성한 서경으로 천도할 것을 제안하고, 고려만의 칭제건원(稱帝建元)을 건의하며 금나라와의 결전을 주장했다. 이들은 서경으로 천도하면 금나라 및 주변의 36국이 신첩이 될 것이라는 낙관적 전망을 내놓으며 왕을 유혹했다. 인종은 서경 세력의 주장에 솔깃했다. 묘청, 백수한, 정지상 등의 서경 세력들은 중앙의 문벌귀족들에게 집중된 권력을 분산시키고자 했고, 인종은 서경의 귀족세력을 이용하여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고 싶어 했다. 이로 인해 인종과 서경 세력들은 의기투합했다.


묘청을 중심으로 한 서경파들은 고려의 독립적 위상을 보여주는 사업뿐만 아니라 민심을 안정시키는 정책도 함께 펼쳤다. 서경파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1년 넘게 중앙 세력들과 대치할 수 있었던 것은 민심을 거스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지방 관리들의 탐학을 엄격하게 다스리면서 농민의 생활 안정에 초점을 맞추고 빈민을 구제하는 등의 개선책을 펼침으로써 국정 전반을 개혁하려는 의지를 보여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송나라의 반격으로 여러 지역에서 패배한 금나라가 고려에 대해 느슨한 태도를 취하고, 개경 중심의 세력들이 천도를 강력하게 반대하면서 서경파들은 난관에 봉착하게 된다. 여기에 더해 중흥사의 탑이 불에 타고, 임원궁의 정원이 폐허가 될 것을 암시한 새의 발자국이 나타나는 따위의 서경에 불길한 조짐들이 잇달아 일어나는 등 사태가 서경파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이에 묘청 일파는 대동강에 기름 먹인 떡을 빠뜨려 오색의 상서로운 기운을 내도록 조작하지만, 이 사실도 김부식 일파에게 들통 나면서 급기야 인종은 서경 천도를 포기한다.



결국 인종 13년 (1135년) 1월 묘청은 서경에 머물던 관료 조광․류감․조창언 등과 함께 서경에 있던 개경 세력들을 체포 구금하고 반란을 일으킨다. 서경을 장악한 후 나라 이름을 대위 (大爲), 연호를 천개(天開), 군대를 천유충의군(天遺忠義軍)이라 칭하고 여러 관속을 두어 그 자리를 모두 서경인으로 임명한다. 반란을 일으킨 서경파들은 “폐하는 음양의 지언을 믿고 도참의 비설을 상고하여 대화 (大華)의 궁궐을 세우고 조천(釣天)의 제부(帝部)를 모방하셨습니다. 그러나 신하들이 임금의 마음을 체득하지 않고 한갓 고토(古土)에 애착되어 옮기기를 어려워할 뿐 아니라 도리어 공을 막기 어려운 것입니다.”고 왕에게 봉서를 올려 인종이 서경으로 도읍을 옮기기를 거듭 제의한다.


그러나 사태는 묘청이 원한대로 진전되지 않았다. 묘청의 난이 전해지자 왕은 김부식을 원수로 삼아 그들을 정벌하도록 명령을 내린다. 김부식은 서경을 바로 공략하지 않고 서북민을 회유하면서 서경을 고립시키는 작전을 펼친다. 예상보다 길어진 싸움의 과정에서 서경파들은 분열하기에 이른다. 개경으로 밀고나가자는 묘청 중심의 강경파와 강화를 주장하는 조광 중심의 온건파로 세력이 나뉜 것이다. 결국 조광은 묘청과 유감, 유감의 아들인 유호의 머리를 베어 정부군에 항복한다. 그런데 정부군이 목을 가져온 윤첨, 조창언, 곽응소, 서정 등을 가둬버리자 서경의 토호, 농민세력들이 다시 봉기하는 사태를 맞이한다. 그러나 서경 반란은 끝내 성공하지 못한다. 서북으로 확산되지 못했던 까닭에 1136년 2월 약 1년에 걸친 반란은 진압된다. 묘청 일파는 몰살당하고 김부식은 승전고를 울리며 개경으로 돌아간다.


묘청의 반란은 고려가 중세 제국주의로 향하는 와중에 불거진 갈등이다. 묘청의 반란은 중국이라는 보편문화의 흐름에 따르는 개경중심파들과 고려의 개별문화를 조성하려했던 서경중심파들 간의 싸움이었다. 운명의 여신은 개경파에게 손을 들어주었다. 서경의 신흥 귀족세력은 김부식을 비롯한 중앙의 문벌 귀족세력을 이길 수 없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보면 개경파의 승리는 금나라를 형님의 나라로 섬긴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개경파들은 금나라와의 전쟁이 승산이 없다는 판단 때문에 강경 외교를 밀고나가지 못했던 것이다. 이런 국제정세에 대한 판단에 있어 개경파가 옳았는지, 서경파가 옳았는지는 판정내리기 어렵다. 일단 묘청의 반란은 김부식에 의해 정리되었고, 역사는 김부식을 전승자로 묘청을 반란자로 기록하였다. 


그러나 근대 들어 역전이 일어난다. 신채호는 망명지에서 쓴 <조선역사상 1천 년래 제1대 사건>에서 이렇게 밝혔다.


서경 전투에서 양편 병력이 서로 수만 명에 지나지 않고 전투의 기간이 2년도 안되지만, 그 결과가 조선사회에 끼친 영향은 고구려의 후예요 북방의 대국인 발해 멸망보다도 몇 갑절이나 더한 사건이니 대개 고려에서 이조에 이르는 1천 년 사이에 이 사건보다 더 중요한 사건이 없을 것이다. 역대의 사가들이 다만 왕의 군대가 반란의 무리를 친 싸움 정도로 알았을 뿐이었으나 이는 근시안적 관찰이다. 그 실상은 낭불양가 대 유가의 싸움이며 국풍파 대 한학파의 싸움이며 독립당 대 사대당의 싸움이며, 진취사상 대 보수사상의 싸움이니, 묘청은 곧 전자의 대표요, 김부식은 곧 후자의 대표였던 것이다. 이 전투에서 묘청이 패하고 김부식이 승리하여 조선역사가 사대적 보수적 속박적 사상, 즉 유교사상에 정복되고 말았거니와 만일 이와 반대로 묘청이 승리했다면 독립적 진취적 방면으로 나아갔을 것이니, 이 사건을 어찌 1천 년래 조선사의 제1대 사건이라 하지 않으랴.


신채호는 반란자 묘청을 혁명가 묘청으로 다시 불러낸다. 신채호는 묘청의 반란을 중앙귀족과 신흥귀족의 싸움으로 보지 않았다. 이것은 근시안적인 해석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신채호는 묘청의 반란을 민족주의 대 사대주의의 싸움으로 해석한다. 그렇기 때문에 화친을 주장한 김부식은 나라를 말아먹은 역적이며, 우리의 역사를 한껏 후퇴시킨 인물로 비난받아 마땅했던 것이다. 반면 반란자였던 묘청은 독립적, 진취적 사상가로서 새로운 평가를 받게 된다. 김부식은 신채호를 만나 완벽하게 패배하고 완벽하게 다시 죽는다. 이 시대의 기운은 김부식을 용납할 수 없었다. 제국주의의 광기 속에서 민족을 지키기 위해 절치부심했던 신채호가 김부식을 오욕스럽게 취급한 것은 그 시대가 만들어낸 어쩔 수 없는 정서였다. 김부식에 대한 매도는 ‘식민’의 광풍 때문이었던 것이다. 지금 읽으면 김부식에 대한, 삼국사기에 대해 지독한 편견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이 시대의 진정성까지 부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는 백성을 구하고자 하는 것 뿐이오."




2. 문장가 김부식 : 정지상과의 대결


김부식은 뛰어난 문장가였다. 고려의 문장하면 반드시 김부식을 떠올린다. 문장가 김부식을 거론하면 자동적으로 뒤 따라 나오는 인물이 있다. 바로 시인 정지상이다. 지금까지도 ‘문장의 김부식’하고 나면 ‘시의 정지상’이 자동적으로 뒤 따라온다. 김부식과 정지상은 나란히 일컬어진다.


정지상은 김부식보다 한 10년 정도 뒤에 태어난 후배다. 김부식은 개경의 문벌귀족 출신이고, 정지상은 서경의 한미한 집안 출신이다. 김부식은 일찍부터 문장으로 주목받고, 관리로서도 승승장구했다. 그에 비하면 정지상은 어려서부터 시로 명성을 얻었으나 과거를 통한 입신의 길은 뜻대로 되지 않아 10여 년 간 여기저기를 떠돌았다. 예종 때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르면서 인종 때 와서야 비로소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정지상은 1127년 척준경을 탄핵하여 추방함으로써 정치적 입지를 다지고 서경세력들이 조정에서 힘을 얻는 데 주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때부터 정지상은 서경파의 중심세력으로 부상하면서 정치적으로 김부식과 대치하게 된다. 


김부식과 정지상의 대결은 ‘묘청의 난’으로 표면화된다. 김부식은 왕에게 묘청의 난리를 진압하라는 명을 받고 서경으로 떠날 채비를 한다. 정지상은 묘청의 난이 터졌을 당시 개경에 체류하고 있었다. 김부식은 군사들을 먼저 보내고 나서 대신들과 정지상 일파를 제거하기로 합의한다. 왕에게는 알리지 않고 부하들에게 정지상, 김안, 백수한을 사형하도록 명령한다. 김부식은 사형이 집행된 후에야 왕에게 알린다.


일체의 심문도 없이 속전속결로 서경파를 사형시킨 김부식의 행동에는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었다. 김부식의 명분은 개경에 남은 정지상 일파가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킨 묘청 일파와 내통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사형에 처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왕에게는 알리지도 않고 정지상 일파를 처벌한 김부식의 처사는 납득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이 때문에 왕은 서경 정벌에 관한 일체의 전권을 김부식에게 주면서도 살육을 많이 하지 말라는 명령을 함께 내린다. 일종의 경고였던 것이다.


김부식의 이 납득되지 않는 행동은 두고두고 논란거리를 남겼다. 정지상은 『고려사』의 「열전」에 정식으로 입전되어 있지 않다. 묘청은 반란을 일으킨 주모자였기 때문에 열전의 ‘반역’조에 기술되었으나, 정지상은 반역자로 기술되지도 않았다. 서경 천도의 중심세력이었지만 묘청의 반란에 직접 가담했다는 증거가 없었기 때문에 아예 정지상의 열전은 쓰지 않았다. 그래도 미진했는지 묘청 열전 뒷부분에 정지상에 관한 이야기를 전한다. “사람들은 김부식과 정지상은 평소에 글에서의 명망이 서로 비등하였으므로 김부식이 불평을 품고 이때에 와서 묘청과 대응했다는 구실로 살해하였다고 했다.”


김부식은 정지상을 반란 때문에 살해한 것일까 아니면...


사관은 속설에 빗대어 김부식의 정당치 못한 처사를 암암리에 비판한다. 당시 여론은 김부식이 정치적 이유 때문에 정지상을 죽였다고 보지 않았다. 김부식이 문장으로 선두를 다투던 정지상을 질투해서 죽였다는 것이다. 김부식은 문장가로서도 시인으로서도 제일인자가 되고 싶어 정지상을 죽인 것이다. 사람들은 김부식의 저의를 의심하며 정지상의 억울한 죽음을 해명했다. 사관도 여론에 동조하여 묘청의 열전 한 자락을 정지상을 해원하는데 바쳤던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바, 정지상은 그 유명한 칠언절구 <송인(送人)>을 지은 시인이다.


雨歇長堤草色多 비 개인 긴 둑에 풀빛이 짙은데

送君南浦動悲歌 님 보내는 남포에 슬픈 노래 울리는구나.

大同江水何時盡 대동강 물은 어느 때에 마를꼬?

別淚年年添綠波 이별의 눈물, 해마다 푸른 물결에 더해지네.


중학교만 졸업하면 정지상의 <송인>은 다 안다. 시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진 이라면 <송시>의 한 구절 정도는 외울 만큼 정지상은 시인으로서 꽤 대중적이다. 조선후기의 문인 신위는 정지상의 시를 ‘우뚝한 대장부 앞에 아리따운 아가씨 같다’고 묘사했다. 정지상의 아름답고 절절한 시적 감성에 사람들은 여전히 공명한다.


그런데 김부식도 정지상과 대결할 정도로 시를 잘 지었다. 조선시대 김부식과 정지상은 특장이 각기 다른 시인으로 평가받았다. “김부식(金富軾)은 충실하지만 아름답지는 못하였고, 정지상(鄭知常)은 아름답지만 떨치지는 못했다.”(성현, 용재총화) “김부식의 시는 엄정하고 전실(典實)하여 정말 덕 있는 사람의 말 같고, 정지상의 시는 말과 운(韻)이 깨끗하고 아름다우며 격조가 호탕하고 빼어나서 만당(晩唐)의 시체(詩體)를 깊이 터득하였으니 두 사람은 기상이 다르다.”(서거정, 《동인시화(東人詩話)》)


고려시대 문사들은 시소(詩騷)를 업으로 삼았다. 문사들에게 문장 수련도 필수였지만, 문사들의 자부심은 시재(詩才)로 좌우되었다. 김부식은 문장가로는 제일이었지만 시에서는 정지상에게 밀렸다. 김부식이 시를 못 썼다는 말은 아니다. 김부식은 시에 있어서도 빼어난 재능을 보였다. 그렇지만 정지상의 시를 제일로 여기는 시대에 이 벽을 넘어설 수 없었던 것이다. 절구시에서 정지상을 따라올 자가 없었다. 김부식은 엄정하고 전실한 특성을 지녔다고 하는데, 시적 운치에서 정지상을 넘어서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김부식과 정지상의 죽음에 얽힌 더 구체적인 일화는 이규보의 『백운소설』에 전한다. 이 일화 속에서 김부식과 정지상은 참으로 치열하면서도 참으로 처절하게 대결한다. 현실에서 김부식은 정지상을 죽이고 정치권력을 잡았지만, 이야기 속에서의 김부식은 정지상의 그늘에 가려진 시인으로 정지상에게 조롱당하고 응징되는 이인자에 불과하다. 고려 사람들은 김부식과 정지상의 설화를 통해 정지상의 재주를 두고두고 아까워하며, 김부식의 질투를 되새겼던 것이다.


시중(侍中) 김부식(金富軾)과 학사 정지상은 문장으로 함께 이름이 났는데, 두 사람은 알력이 생겨서 서로 사이가 좋지 못했다. 정지상이 지은 시구 때문이었다. 일찍이 정지상은

“琳宮梵語罷 : 임궁(琳宮)에서 범어를 파하니(절에서 염불소리 끝나니)

 色凈琉璃 : 하늘 빛이 유리처럼 깨끗하이”
라는 시를 지은 적이 있다. 김부식이 이 시를 좋아하여 자기의 시로 삼으려 하자 지상은 끝내 들어주지 않았다. 뒤에 지상은 부식에게 피살된다.


사람들은 김부식이 반란자 정지상을 죽였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김부식이 정지상의 시를 넘어설 수 없자 질투해서 죽여버렸다고 단정하면서, 사람들은 뒷이야기를 만들어내었다. 피살된 정지상은 음귀(陰鬼)가 되어 김부식에게 나타난다.



“부식이 어느 날 봄에 관한 시를 지었다. “柳色千絲綠 버들 빛은 일천 실이 푸르고 / 桃花萬點紅 복사꽃은 일만 점이 붉구나.”라고 지은 것이다. 갑자기 공중에서 정지상 귀신이 부식의 뺨을 치면서, “일천 실인지, 일만 점인지 누가 세어 보았는냐? 왜 ‘柳色絲絲綠 버들 빛은 실실이 푸르고 / 桃花點點紅 복사꽃은 점점이 붉구나’라고 하지 않는가?”라고 하며 부식의 시를 조롱했다.“


시의 문외한인 우리도 ‘일천 실이 푸르고, 일만 점이 붉다’보다는 ‘실실이 푸르고, 점점이 붉구나’가 시적으로 훨씬 운치가 살아있음을 느낄 것이다. 김부식은 이처럼 시에 있어서는 정지상의 하수였다. 이런 정지상을 미워하고 질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느 날인가 부식이 한 절에 가서 측간에 올라 앉았더니, 정지상 귀신이 뒤쫓아 와서 음낭을 쥐고 묻기를, “술도 마시지 않았는데, 왜 낯이 붉은가?”했다. 부식은 천천히 대답하기를, “언덕에 있는 단풍이 낯에 비쳐 붉다.”고 했다. 정지상의 귀신은 음낭을 더욱 죄며, “이놈의 가죽주머니는 왜 이리 무르냐?” 부식은, “네 아비 음낭은 무쇠였더냐?”하고 얼굴빛을 변하지 않았다. 정지상 귀신이 더욱 힘차게 음낭을 죄므로 부식은 결국 측간에서 죽었다.”


이야기 속에서 김부식은 어이없게도 측간에서 죽는다. 음낭을 죄는 정지상에게 지지 않으려고 끝까지 대들다가 김부식은 끝내 죽게 된다. 실제로 김부식이 측간에서 죽었는지 알 수 없다. 이 죽음은 김부식이 정지상의 시를 질투하여 피살한데서 비롯된 일종의 인과응보지만, 김부식의 라이벌 의식은 이 정도로 치열했다. 사람들은 정지상의 손을 들어줬다. 사람들은 질투에 눈이 멀어 아까운 인재를 죽인 김부식을 용납하지 않았다. 게다가 참으로 치졸하면서도 어이없게도 측간에서 죽은 것으로 마무리했다. 장렬한 죽음조차 허용되지 않았던 불운한 김부식. 



글_길진숙(남산강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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