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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백수는 고전을 읽는다

공부, 그 치열한 '삶의 현장'

by 북드라망 2012. 3. 12.
젋은이들이여, 삶을 보라!

류시성(감이당 연구원)

子曰 弟子入則孝 出則弟 謹而信 汎愛衆 而親仁 行有餘力 則以學文(學而 6)
자왈 제자입즉효 출즉제 근이신 범애중 이친인 행유여력 즉이학문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젊은이들은 집에 들어가면 부모에게 효도하고 밖에 나가면 어른을 공경하며, 말을 삼가되 (말을 하게 되면) 성실하게 하며, 널리 사람들을 사랑하고 어진 사람을 가까이해야 한다. 이것을 행하고 여력이 있으면 문헌을 배운다.”

 “인간도 안 된 놈이 공부는 해서 뭘 해!” “요새 세상엔 공부해서 출세하는 게 최고야!” 부모들이 자식을 두고 벌이는 이 설전은 그 자체만으로도 많은 것을 이야기해 준다. 인간이 되는 것과 학문(學文)하는 것 사이의 틈. 거기로부터는 오는 앎과 삶의 철저한 분리. 그리고 공자 시대나 지금이나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이는 부모들의 고민까지. 그런데 이 설전엔 매우 흥미로운 문제가 숨어 있다. 더구나 그 문제는 우리에게 다른 차원에서 앎과 삶을 고민하도록 만든다.
 
문제는 ‘공부해서 뭐할 건데?’라는 질문에 있지 않다. 오히려 우리는 내 공부를 펼칠 장이 어디인가를 먼저 물어야 한다. ‘인간이냐 공부냐 그것이 문제로다’라는 이분법이 빠뜨린 장소.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우리에겐 이미 그 장이 주어져 있다. 아니 이미 그 장에서 살고 있다. 바로 지금 나를 형성하고 있는 관계, 나를 둘러싼 이 세계가 그것이다. 그러니 문제는 인간이니 공부니 하는 선택보다 그것들과 지금 우리의 삶을 어떻게 조우하게 할 것인가에 있다. 아마도 부모들의 설전도 공자의 고민도 이 문제 위에 서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우리는 공자의 도식을 마냥 따라갈 순 없다. 이 문장에서 공자가 강조하고 있는 효제(孝弟)와 우리 시대의 그것은 너무나도 다른 배치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 문장의 본질적인 문제와 마주하게 된다. 공자가 말하는 효제(孝弟)란 무엇인가. 우리에게 효제(孝弟)란 무엇인가. 여기에 답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이 문장을 넘어서 앎과 삶을 다른 차원에서 고민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효제(孝弟)는 흔히 공동체 윤리로부터 출발했다고 말해진다. 공자가 孝弟를 강조하고 있는 것도 이 맥락에서다. 공자가 살던 춘추시대는 지금처럼 이동이 용이하지 않았던 시대였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도 자신이 태어난 마을에서 평생을 살다가 죽는 게 보편적이었다. 삶 전체가 한 시공간에서 이루질 수밖에 없는 조건이었다. 그러니 그 마을에서 뿌리박고 살기 위해서는 일단 구설수에 오르지 않는 게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다. 특히 부모나 동네 어른에게 싸가지 없게 구는 인간은 동네에서 추방당하는 일까지 벌어지던 시대였다. 즉, 孝弟는 내 삶의 현장에서 피부로 부딪히는 사람들과 관계 맺고 살기 위해서 필요한 윤리였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관계의 윤리가 한나라 때에 이르러서는 국가적 캠페인의 형태로 등장한다. 춘추전국시대의 혼란기를 지나고 진(秦)·한(漢)의 통일제국을 거치면서 사회는 점차 안정된다. 이때 상하의 계급질서를 공고히 하기 위해 요청된 게 바로 孝弟다. 아버지를 죽이고 왕이 되는 자식, 신하가 왕을 죽이고 왕권을 찬탈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던 춘추전국시대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다. 우리에게 익숙한 충(忠)도 국가적으로 이념화된 것도 이때다. 孝弟도 마찬가지. 하지만 공자가 이 문장에서 말하고 있는 孝弟는 국가적 차원에서 절단 채취된 윤리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공자에게 孝弟가 중요했던 건 그게 인(仁)을 행하는 근본이었기 때문이다. 인(仁)은 공자 사상의 핵심 키워드로 쉽게 말하면 애인(愛人)의 마음이다. 愛人이라고 해서 무슨 불꽃 같은 사랑을 떠올리진 말자. 한문에서 애(愛)란 한 대상에 국한된 차원을 넘어선 사랑을 지칭하는 말이니까. 오히려 남녀 사이의 불붙은 사랑은 회(懷)라는 말로 표현한다. 회인(懷人), 한 사람을 가슴 속에 품는다(멋지다^^). 아무튼 핵심은 남을 사랑하는 마음에 있다. 그러니 인(仁)의 마음은 내 부모를 사랑하고 동네어른을 공경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리고 바로 여기가 이 문장의 포인트다.

공자는 애인(愛人)을 강조하면서 가장 현실적인 장을 간과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우리가 애인(愛人)이라는 말에 홀려 그 장을 초월하기라도 한 듯이 우리에게 구체적인 현장을 지목한다. 孝弟가 바로 그것이다. 공자는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하고 인격이 훌륭한 인간이라도 결국은 이 관계망 안에서 삶을 구성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다. 그리고 애인(愛人)의 마음은 이 현장에서 발휘되어야 한다고 젊은이들에게 주문한다. 북송의 유학자 정이천은 공자의 이 주문을 이렇게 표현한다. “젊은이가 된 직분은 힘이 남음이 있으면 글을 배우는 것이니, 그 직분을 닦지 않고 문(文)을 먼저 함은 자기를 위한 학문이 아니다.” 즉, 자기 삶의 공간을 떠난 앎이나 실천이란 자기 삶을 풍족하게 하는 학문(學問)이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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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여기에 우리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우리와 공자는 서로 다른 현장을 가지고 있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리나 공자 모두 孝弟라는 공통분모를 제거할 순 없을 거 같다. 어떻게 나를 낳아 준 부모를 부정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나 반대로 우리는 여기서 孝弟를 재고할 필요가 있다. 아마도 공자라면 우리 시대를 관통하는 관계에 집중하라고 주문했을 테니까. 그리고 그 관계에서 출발한 윤리로 그 시대의 사람들과 접속할 수 있는 사유를 구성하라고 말할 테니까. 그러니 지금 우리에게 孝弟란 우리 삶의 핵심으로 자리 잡은 관계가 무엇이냐고 묻는 기묘한 기호이기도 하다. 효도하고 공경하는 놈이 없다고 투덜거릴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삶의 관계가 근본적으로 변화하고 있는 건 아닌가를 물어야 한다는 말이다. 공자는 스스로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윤리라고 생각하는 ‘그것’, ‘그것’을 너희들은 가지고 있냐고 반문한다. 그래서 사실 이 문장은 아무리 봐도 빈칸으로 되어 있다. 우리가 우리 삶에서 발견하고 채워 넣어야 할 빈칸들로.

문장의 마지막. 공자는 문(文)에 대해 힘주어 말한다. 대부분은 책 보는 것을 제일 나중에 한다고 해석한다. 하지만 이 마지막은 도돌이표처럼 우리를 문장의 제일 앞으로 옮겨 놓는다. 책 보는 일이 전부인 것처럼 여기는 젊은이들여, 삶을 관찰하라. 그 삶에서 풀리지 않는 답을 이 문(文)에서 찾으라. 그리고 다시 삶으로 돌아가라. 그러니 이 문장은 무엇을 먼저하고 무엇을 나중에 해야 하는 선택의 문제로 환원되지 않는다. 오히려 뫼비우스의 띠처럼 앎과 삶을 순환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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