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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드라망 이야기 ▽

영화 〈위플래쉬〉앤드류와 플렛처, 승자는 누구인가?

by 북드라망 2016. 2. 23.

영화 위플래쉬

박진감에 가려진 우울을 봐야 한다




나는 극장엘 가지 않는다. 그렇지만 영화 보는 걸 좋아하기는 한다. 아무 때나 돌려볼 수 있고, 마음에 드는 장면을 반복해서 볼 수도 있으며, 지루해서 견디지 못할 것 같은 때에는 나가서 커피라도 한 잔 타서 올 수 있는 '방'에서 영화를 보는 것이 좋다. 이건 어쩌면 '세대'의 문제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게 무슨 영화든) '영화'를 보는 것이 재미있다고 처음으로 느꼈을 때가 중요한데, 나에게 그런 순간은 초등학교 때, 집에서, 비디오로 영화를 봤을 때이기 때문이다.


내 인생의 영화 『아담스 패밀리』


학교에 갔다가 돌아오면 식탁에는 2~3천원 쯤 되는 돈과 엄마가 써놓은 편지가 놓여져 있었다. 그 돈을 가지고 비디오 가게에 가서 영화 한편을 빌리고, 비디오 가게 옆에 있던 슈퍼에 들러 과자 한봉지를 사가지고 오면, 즐거운 오후를 보낼 준비가 되는 것이었다. 당시에 봤던 영화들은 『아담스 패밀리』, 『구니스』, 『후크』, 『베토벤』 같은 것들이었다. 여하간 집 거실에 널부러져서 과자를 까먹으며 영화를 보았던 그 경험 때문에 그렇게 영화를 봐야 즐겁기도하고 '잘' 본 것 같다. '팔걸이'를 두고 벌이는 영토확장전쟁이나, 실수로라도 의자를 차게 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라든가, 듣기를 원하지 않음에도 들려오는 옆사람들의 속삭임이라든가…, 어쩌다가 가는 극장은, 역시 불편하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내가 영화를 보는 행태는 사실 '책읽기'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원하는 곳에서 끊기도 하고, 보다가 화장실에 다녀오기도 하며, '일시정지' 후에 대사 한마디를 다시 생각해 보기도 한다.(이런 점들이 다른 매체와 구별되는 '책'이 가진 특출난 장점들이라고 생각한다.)


지난 주말에도 그런 식으로 영화 한편을 봤다. 『위플래쉬』. 이 영화를 무슨 영화라고 해야 할까? '음악 영화'라고 하기에는 표면 아래에 감춰진 코드들이 참 다양하다. '성장 영화'라고 하기에는 '희망찬 결말'과는 거리가 멀다. '스릴러' 뺨치는 스릴이 있지만, 당연하게도 스릴러물은 아니다. 하나의 우세한 정체성으로 귀속되지 않는 작품은 대개 두가지로 나뉜다. '명작'이거나 '괴작'이거나. 『위플래쉬』는 전자에 가깝다.



열정과 광기 사이



주인공 네이먼 앤드류는 19세, 소년과 청년의 경계에 서 있는 나이다. 재즈 음악인을 양성하는 음악전문학교 드럼 전공 1학년생이다. 혼자 연습실에 앉아 '더블타임스윙'을 연습하는 앤드류는 학교에서 가장 잘나가는 밴드인 '스튜디오밴드'를 지도하는 플렛처 교수의 눈에 띄게 되고, 그의 밴드의 보조 드러머로 발탁된다. 발탁되는 그 시점부터 플렛처의 '이상한 교육'은 시작되는데, 수업 개시 시간이 오전 9시임에도 앤드류에게 오전 6시까지 밴드 연습실로 오라는 지시를 내린다. 6시 3분에 잠에서 깬 앤드류는 미친듯이 연습실로 뛰어간다. 그리고 계단에서 한차례 넘어진다. 그러나 그렇게 도착한 연습실엔 아무도 없다. 드럼 세트에 앉아 3시간여를 흘려 보낸다. 이 장면은 이후 앤드류가 경연에 늦어 급히 차를 몰다가 트럭과 교통사고가 나는 후반부 장면에서 확대 심화되어 반복된다. 처음엔 계단에서 넘어졌지만, '열정'이 '광기'로 전환되는 것에 맞추어 '트럭'과 충돌하게 되는 것이다. 영화 속에는 이런 식으로 이어지는 전-후반 장면들이 있는 듯하다. 스튜디오 밴드의 첫 연습에서 네번째 박자에서 앤드류의 뺨을 때리며 '템포'를 설명하는 장면과 후반부 교통사고 직후 공연장에 도착한 앤드류가 플렛처를 밀어 넘어뜨리는 장면도 그런 식으로 이어지는 듯하다.(확실히 알려면 영화를 두어번 더 봐야겠지만.)


설명한 장면들만 가지고 생각해 봐도 알 수 있듯이 플렛처 교수의 교육방법은 '학대'에 가깝다. 학생을 심리적, 육체적으로 극한까지 밀어붙여서 한계를 넘어서게 만드는 방식이다. 앤드류는 플렛처 교수의 이러한 교육방법에 적극적으로 동조한다. '위대한 드러머'가 되기 위해 여자친구에게 이별을 통보하고, 한없이 짙어지는 다크서클에도 불구하고 연습을 멈추지 않는다. 그 과정 속에서 영화는 '열정'이 '광기'로 바뀌는 모습을 훌륭하게 보여준다. 어쩌면 그것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인정욕망



재미있도 하고, 약간 섬뜩하기도 한 부분들이 눈에 띄는데, 바로 '인정욕망'과 관련된 부분들이다. 그것은 플렛처 교수가 가진 이중적 성격과 관련되어 있다. 음악학교의 학생들 대부분은 플렛처 교수의 밴드에 들어가길 선망한다. 그와 동시에 플렛처 교수는 역시나 대부분의 학생들에게 '공포'의 대상이기도 하다. '악마'와 비슷하지 않은가? 공포의 대상이지만 '영혼'을 넘기면 최고가 될 수 있다고 유혹하는 전설상의 '악마'의 이미지는 여기에서 다시 한번 반복되는 셈이다. 플렛처의 밴드에 들어간다면 졸업 후 재즈신에 자리잡기가 훨씬 쉬워진다. 문제는 플렛처의 혹독한 교수법을 견디는 것이다. 플렛처의 밴드에 들어간다고 해서 끝이 아니다. 그 안에서도 가혹하기 그지 없는 경쟁을 견뎌야 한다. 이 경쟁을 견디지 못하는 자는 곧장 교실 밖으로 '추방'되고 만다. 예를 들어 앤드류가 처음 참가했던 연습 장면을 보자. 아무런 문제없이 연주를 했지만, 일부러 몰아치는 플렛처의 압박을 견디지 못한 트럼본 주자는 자신이 '틀렸다'고 말하고 만다. 그리고 연습실에서 추방 당한다. 이 장면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의 은유라고 보는 것은 자연스럽다.


이런 과정이 반복될 때마다 플렛처의 권력은 강화되고 있다. 연습실 밖으로 내보낼 수 있는 권한을 가진 플렛처, 작은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 플렛처에게 '인정' 받는 것이 궁극적으로는 '음악계'에서 살아남는 길이기 때문이다. 다만, 여기서 보아야 할 것은 '나쁜 놈' 플렛처가 아니다. 플렛처의 전제성을 강화시키고 있는 결정적인 요소는 학생들의 '인정욕망'이기 때문이다. 물론 판을 깔아놓은 것은 플렛처이지만, 학생들이 단순히 피해자라고 볼 수는 없다. 음악계에서 성공하고 싶은 절박함, 플렛처에게 인정받음으로써 자신의 자리를 확고하게 지키고 싶은 욕망이 플렛처의 전제성을 더욱 강화하는 기제가 되고 있는 것이다. 열정이 광기로 변하는 것이 한순간인 것처럼, 인정 받고 싶은 욕망이 노예의 욕망으로 변하는 것 역시 한순간이다. 한국의 입시제도를 비판하면서도 제 자식의 대학문제에서는 충실하게를 넘어 과도하게 입시제도와 입시문화에 복종하는 것과 같은 셈이다.



어떻게 '어른'이 되는가



앤드류의 어머니는 그가 갓난 아기일 때 앤드류와 아버지의 곁을 떠났다. 작가이자 고등학교 교사인 아버지가 그를 키웠는데, 아버지는 그를 전폭적으로 지지한다. 아버지와의 관계도 좋아서 주말마다 아버지와 함께 극장엘 간다.("난 아직도 아빠랑 극장엘 가") 사실 아버지와 앤드류의 관계는 밑밥이고, 그의 미성숙을 보여주는 핵심적인 고리는 플렛처와의 관계에 있다. 영화 초반 앤드류는 플렛처의 밴드에 들어가길 위해, 플렛처에게 인정받기 위해 무던히 애를 쓴다. 템포를 제대로 맞추지 못해서 여러 번 따귀를 맞는 과정에서도 그는 화를 내기보다는 억울해 한다. 연습실에서 뛰쳐나가지도 못한다.


집으로 돌아와 아버지에게 걸려오는 전화를 받지 않고 연습에 몰두하는 장면, 이 장면이 첫번째 성장의 포인트다. 스스로 무언가를 쌓아 올리려고 발버둥 치는 것이다. 극 후반부에서 이런저런 사건 사고들로 인해 경연에 늦게 되고, 자신이 지금까지 쌓아올린 노력들 마저 깡그리 무시하는 플렛처에게 대드는 장면이 두번째 포인트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때까지도 앤드류는 아직 '소년'에 가깝다. 자기 증명의 욕망을 책임감이 따라오지 못하는 상태, 모든 것을 망쳐버리는 격정적 분노까지… 영화의 후반부에 이르면 한 소년이 어떻게 '어른'이 되는지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앤드류의 증언으로 학교에서 쫓겨난 플렛처는 앤드류에게 재즈페스티벌 드럼 파트를 부탁하고는 엉뚱한 곡을 연주해 앤드류를 짖밟아버리려고 한다. 결국 앤드류는 엉성한 연주 끝에 무대 뒤로 도망치듯 나가버리고, 그의 아버지는 앤드류를 안아주며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가자고 말한다. 집으로 돌아간다면? 앤드류는 영영 '어른'이 되지 못할 것이다. 다시 무대로 돌아와 플렛처와 전쟁을 벌이는 앤드류. 어두운 얼굴로 아들의 연주를 바라보는 아버지는 그가 이제 완전히 자신의 품을 떠났다는 것을 느낀다. '어른'에게는 돌아갈 품이 없다. '어른'은 맨몸으로 사는 자의 이름이 아닐까? 앤드류는 그렇게 맨몸이 되었다.



앤드류와 플렛처, 승자는 누구인가?



영화의 마지막 부분은 열려있다. 심하게 열려있다. 앤드류를 짓밟아 버리려고 엉뚱한 곡을 연주했던 플렛처조차 앤드류가 펼치는 무아지경의 연주에 빠져든다. 연주 막판 플렛처는 앤드류의 연주를 독려하고, 앤드류의 신호에 맞춰 밴드에게 '피니시'를 지시하기까지 한다. 이때 앤드류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오른다. 플렛처는? 플렛처의 눈을 잘 보시길. 앤드류를 완벽하게 자신의 것으로 만든 것 같은 눈이다. 플렛처가 앤드류에게 재즈페스티벌 오프닝 무대에서 드럼을 맡아주길 부탁하는 장면에서 '난 정해진 한계를 뛰어넘게 하고 싶었다'는 말만큼은 진실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앤드류가 '정해진 한계'를 넘는 다는 것은 결국 플렛처가 쳐놓은 '구조' 속으로 다시 휘말려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셈이다. 앤드류가 플렛처의 '안티테제'로서 기능하면서도 다시금 (플렛처의) 진테제로 종합되고 마는 장면인 셈이다. 사용한 표현대로 '변증법'이 생각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다.


이 영화는 대단히 감동적이지만, 그 감동만큼이나 우울한 영화이기도 하다.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박진감'이 자칫 그 '우울'을 놓치게 만들 수도 있다. 나는 그 점 역시도 영화가 전달하는 메시지가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전제적 체제'는 '박진감'이 넘친다. 그 '박진감'과 '흥분' 때문에 표면 아래의 수많은 '우울'과 '슬픔'이 감지되기 어렵다는 것이다. 앤드류가 여자친구에게 이별을 통보하며 했던 말, "나는 위대해지고 싶어"가 그 증거가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만약, 그가 '위대함'에의 열망을 동력으로 삼지 않고, 좀더 소박한 만족을 동력으로 삼아 정진했다면 어땠을까? 당연히 '위대해 지고 싶어서' 노력하는 것보다 '소박한 만족을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훨씬 힘들다. 아마 그랬다면 앤드류는 플렛처에게 '종합'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위플래쉬 - 10점
데미안 차젤레 감독, J.K. 시몬스 외 출연/콘텐츠게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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