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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나의 고전분투기

[대학] 언제 백성은 스스로 춤을 추는가?

by 북드라망 2015. 12. 2.


[나의 고전분투기 - 『대학장구』]

휘말림의 정치학, 推己及人(추기급인)



지난 연재에서 예고한 대로 백성들은 왜 스스로 춤을 추는가? 군자는 왜 스스로 명덕을 밝히려 하는가를 생각해 보려고 한다. 『대학장구(大學章句)』의 3강령 「大學之道, 在明明德, 在親(新)民, 在止於至善。 (대학지도, 재명명덕, 재친(신)민, 지어지선。)」은 자신의 명덕을 밝혀서, 백성을 새롭게 하고, 지극한 선의 경지를 유지하는 것이다. 이는 자신의 덕으로부터 천하로 확장되어 나가는 推己及人(추기급인)의 구도다. 推己及人(추기급인). 자신을 밀어 붙여서 남에게 미친다. 나의 질문은 推己(추기)라는 의미가 대체 무엇일까 하는 것이다.


우선 明德(명덕)에 대해 주자가 무어라고 주석을 다는 지를 보자. 주자는 明德(명덕)이란 하늘이 부여한 능력으로, 이치가 이미 구비되어 있어서 만사에 응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하면서, 虛靈不昧(허령불매)라고 주석했다. 그러니까 우리의 인식능력은 영혼이 텅~비어 어둡지 않음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선생님께서 허령불매에 대한 설명을 해주셨을 때, 적잖이 충격이었다. 하늘이 부여했다면 방대한 데이터베이스로 꽉 채워져 있어야 하는데 반대로 텅 비어있어서 오히려 어둡지 않을 수 있다니....


네? '텅 비어있어 어둡지 않기 때문'이라구요?



비어있다는 것은 무(無)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한(無限) 곧 한계없음을 말하는 것 같다. 방대한 데이터베이스란 그것이 아무리 많더라도 결국은 고정적인 대응을 전제하는 것이니, 그 데이터베이스에 없는 것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텅 비어 있으되 어둡지 않다는 것은 오히려 아무것도 고정하지 않았기에 만사에 응해서 가장 적합한 솔루션을 만들어 낼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明明德(명명덕)한다는 것은 자신이 이러한 능력이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허령불매한 능력을 타고 났다면 세상 사람들 모두 공자님 같은 성인만 있어야 하는 거 아닐까? 하지만 세상은 소인배들이 득실거리는데 이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주자는 하늘로부터 明德(명덕)을 부여 받았으나 각자의 기질에 구애되고, 욕심에 가려져 있기에 그 능력을 깨닫지 못한다고 설명한다. 그러니까 대학의 첫 번째 강령이 明明德(명명덕)인 것이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인 것처럼, 明(명)하지 못하면 그것이 구슬인 줄도 모르기에 꿰어볼 생각도 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요컨대 明明德(명명덕)하면 자신의 기질과 욕심을 넘어설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17세기 서양의 데카르트가 해결하려 한 문제와 비슷해 보인다. 데카르트에 의하면 인간은 신이 준 본유관념을 이성의 타고난 능력으로 가지고 있기에, 경험적 지식의 불명료함을 극복하고 분명하고 뚜렷한 판단, 즉 진리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인간은 이성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신체와 정념이 제멋대로 날뛰기에 이성이 지배하는 정신과 정념이 지배하는 신체의 일치를 이루기 위한 도덕학(혹은 윤리학)을 중시했다. 데카르트의 『정념론』은 이러한 일치를 이루기 위해 감정과 정념을 탐구한 책이다. 완전한 능력을 가진 이성이 제멋대로인 감정과 정념을 규제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이들에 대해 잘 알아야 하기 때문에 쓴 책이다. 요컨대 데카르트의 해결책은 어떻게 이성이 신체를 규제할 수 있을 것인가에 집중되어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대학의 明明德(명명덕)과 그것을 확장한 親(新)民(친(신)민)은 비슷해 보이지만 다른 구도를 갖는 것 같다. 이성이 정념을 규제하는 구도와 명명덕의 구도를 같이 본다면, 개인의 내면을 수련하는 측면에서는 비슷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엄격한 자기절제를 통해서 기질과 욕심의 극복이라는 목표를 달성할 수 있겠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런 엄격한 절제와 규율로 백성을 북치고 춤추게 할 수 있을까?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내면의 소리인 이성의 명령과 절제만으로 정념을 넘어설 수 있을까?


주자는 어떻게 생각했을까? 儒學(유학)이라 하면 자기관리에 철저한 꼬장꼬장한 선비가 자동으로 떠오르기에 데카르트의 도덕학과 비슷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러나 주자는 ‘作新民(작신민)’의 ‘作(작)’을 주석하면서 ‘鼓之舞之之謂作(고지무지지위작)’, 백성이 북치고 춤을 추게 하는 것을 작이라 이른다고 주석했으니, 절제와 규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북치고 춤추는 것은 이성이 아니라 정념에 호소하는 것이다. 기쁘고 즐겁지 않다면 춤을 출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무식한 백성이기 때문에 정념에 호소하고, 지배계급인 군자에게는 이성에  호소하는 것일까? 정념은 이성보다 힘이 세다. 그렇지 않다면 배운 자들이 그토록 욕심에 휘둘리지는 않을 것이다. 


백성들이 절로 춤이 나오도록 기쁘고, 즐겁게 하는 것이 단지 배우지 못한 자들이라 정념에 호소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까?



주자의 주석에서 이를 해명할 속 시원한 구절을 찾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단서가 될 만한 눈에 뜨이는 전의 배치가 있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대학장구』는 예기의 『대학』의 구절들을 주자가 재배치하고 주석을 붙인 것인데, 明明德(명명덕)을 해석했다고 묶은 전 1장과 止於至善(어지선)을 해석했다고 묶은 전 3장이 좀 특이하다. 전 1장에는 원본의 중간쯤에 있는 서경의 인용문을 배치하고, 전 3장에는 원본의 각기 다른 부분에 있는 시경의 인용문을 모아서 배치하였다. 아시다시피 서경은 중국상고시대의 정치를 기록한 역사서이고, 시경은 중국고대의 시와 노래를 공자가 추린 것이다. 明明德(명명덕)을 해석한 전 1장은 주나라, 상나라, 요나라의 편에서 인용한 구절들이 실려 있는데, 능히 명덕을 밝힐 수 있다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는 명덕을 밝힌 역사적인 전거를 들고 있는 것이다. 반면에 止於至善(지어지선)을 해석한 전 3장은 모두 止於至善(지어지선)을 얻은 것을 찬미하는 시다. 시나 노래는 감성에 호소하는 것이다. 흥겨운 노래가 나오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저절로 어깨춤이 나온다. 그렇다면 전의 구도는 역사적인 전거를 들면서 인간이라면 모두 明明德(명명덕) 할 수 있다는 것과 明明德(명명덕)하여 止於至善(지어지선)을 얻은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찬미하는 것이다. 그것은 이성의 규율이 아니라 매혹을 말하고 있는 것이고, 정념에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군자는 왜 명명덕하려 하는가? 그것은 내면의 명령이 아니라, 명명덕하여 지어지선한 삶을 살다간 성인에게 매혹되었기 때문이다. 백성은 왜 북치고 춤을 추는가? 明明德(명명덕)하여 止於至善(지어지선)한 삶을 사는 군주에게 매혹되었기 때문이다. 유가에서 성인의 삶을 끊임없이 강조하는 이유는 단지 모범을 제시하는 것 이상인 것 같다. 성인의 그 아름다운 삶을 노래하여 감응을 불러일으키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글을 읽는 군자는 마치 연애의 경험처럼 자기도 모르게 자신의 기질과 욕심을 그만 훅 넘어서 버리는 것이다.


데카르트의 구도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하는 고립된 개인, 자연과 분리된 고립된 인식주체에서 출발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데카르트의 구도와 『대학』의 推己及人(추기급인)의 구도는 전혀 다른 것임을 이해할 수 있다. 특히 유가는 불가와 달리, 속세에서 도를 이루면서 사는 것을 모색했기에, 고립된 개인이 아니라, 사회와 결부된 나, 자연과 결부된 나로부터 출발한다. 명덕을 밝히는 것이 推己(추기)하여 及人(급인)이 되지 못한다면, 제대로 明明德(명명덕)을 한 것이 아니다. 자신의 명덕으로 타인을 고무시킬 수 없다면 親(新)民(친(신)민)하지 못한 것이니, 사실은 明明德(명명덕)을 하지 못한 것이다. 요컨대 推己及人(추기급인)은 휘말림의 정치학이다. 내가 성인의 삶에 휘말려들어야 하고, 남이 나의 훌륭한 삶에 휘말려 들게 해야 한다.


글_최유미


독서도 하나의 휘말림이다!


☆ 오늘의 『대학 』 문장 ☆

* 경 1장 

大學之道, 在明明德, 在親(新)民, 在止於至善。
(대학지도, 재명명덕, 재친(신)민, 재지어지선。)
자신의 명덕을 밝혀서, 백성을 새롭게 하고, 지극한 선의 경지를 유지하는 것이다.


* 주자 주
鼓之舞之之謂作。言振起其自新之民也。
(고지무지지위작, 언진기기자신지민야。)
백성을 새롭게 한다는 것은 백성들이 스스로 북치고 노래하게 하는 것. 백성이 기뻐서 스스로 자신을 새롭게 하여 떨쳐 일어나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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