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사는게 지루해? 혹시 기허? 여행처럼 몸에 새로운 길을 내는 '보중익기탕'


권태와 중독 사이

– 보중익기탕의 낯선 체험 -




애니메이션 영화 〈슈렉포에버〉의 화두는 권태다. 괴물의 이미지를 벗고 안락한 삶을 살게 된 슈렉은 매일 똑같은 일상에 권태를 느낀다. 급기야 단 하루, 괴물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는 악당의 꼬임에 넘어가 위험한 계약을 하고 만다. 슈렉은 괴물이었던 리즈(?)시절을 하루 동안 만끽하는 대신 그의 일생 중 하루를 악당에게 내어주었다. 그 많은 날들 중 단 하루쯤이야 얼마든지 반납할 수 있었다. 그런데 악당은 그 하루를 슈렉이 태어난 날로 정했다. 악당이 슈렉의 태어난 날을 빼앗았기 때문에 슈렉은 존재하지 않게 된다. 따라서 괴물로 살게 된 하루가 지나면 돌아갈 몸이 없어진다.


평화로운 삶을 권태로 느껴 자신을 건 도박을 한 슈렉.



슈렉이 이런 위험한 거래를 감행한 것은 지긋지긋한 일상의 반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다. 안락한 집에서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과 평화롭게 살고 있지만 어떠한 모험도 없이 매일 같이 반복되는 평범한 가장으로서의 역할이 슈렉에겐 체질적으로 맞지 않았다.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지루함은 누구에게나 힘겹다. 한스 요나스는 생명의 본성이 자유를 찾아 떠나는 것이라고 했다. 권태는 자유와 활동성이 억압되면서 생겨난다. ‘지겹다’는 것처럼 생명을 답답하게 만드는 것이 또 있을까. 생명의 모든 활동은 이 권태와의 싸움과 관련이 있는 지도 모른다. 파스칼은 권태로부터 탈출하려는 사람들의 본성을 토끼 사냥에 비유한다. 


돈으로 사는 것이라면 원치도 않을 토끼를 온종일 쫓아다니는 것은 참으로 불합리하다고 생각한다면 그들은 우리의 본성을 전혀 모르고 있는 것이다.

파스칼, 이환 옮김, 『팡세』, 민음사, 139쪽


토끼 사냥을 하는 사람에게 토끼를 주고 사냥을 하지 말라고 한다면 사냥꾼은 순순히 그 말을 따를까? 낚시꾼에게도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물고기를 줄테니 낚시를 하지 말라고 하면 과연 낚시꾼이 좋아할까. 이들의 목적은 포획물보다는 포획하는 과정에 있다. 살아서 날뛰는 자연의 생명체를 잡을 때 느끼는 짜릿함이 포획물의 획득보다 우위에 있다. 설령 사냥과 낚시의 목적이 생존에 있다 하더라도 그 행위가 주는 짜릿함을 놓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이것이 파스칼이 말하는 인간의 본성이다. 반대로 본성을 억압하는 건 비활동적인 조건이다. 파스칼은 방 안에 있는 것만 제외한다면 사람들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 방은 비활동적 혹은 반복적이고 권태로운 일상을 상징한다. 생명의 본성은 그곳으로부터 탈출하려고 한다. 살기 위한 몸부림이다.


낚시의 목적은 '먹거리'보다 '손맛'?!



그런데 슈렉이 그랬던 것처럼, 권태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부여잡은 것이 삶을 위협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어떤 경우엔 도박, 폭력, 마약, 쇼핑, 게임 등과 같은 각종 중독에 빠지기도 한다. 살기위한 선택이 삶을 위협하는 아이러니. 어쩌면 그건 실수가 아니라 무의식적으로 의도된 선택일 수도 있다. 삶을 위협할수록 더 짜릿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런 미봉책으로는 권태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중독은 쾌락을 낳고 쾌락은 인식의 시야를 좁힌다. 권태를 벗어나려면 인식의 확장이 필요하므로 근본적으로 중독은 권태를 묶는 사슬일 수밖에 없다. 또한 중독은 비슷한 패턴을 반복한다는 점에서 또 다른 권태를 생산해 낸다. 그래서 자극의 강도는 점점 더 강해진다. 


권태를 다루는 좀 더 현명한 방법은 반복되는 쾌락적 자극이 아니라 오히려 조금은 낯설고 불편한 새로운 삶의 시도에 있다. 예컨대, 평소에 사고 싶었던 상품을 소비하는 것으로 지루함을 달래는 것보다 낯선 장소를 여행하는 것이 낫다. 상품은 익숙한 쾌락을 선사하며 권태를 벗어나게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쾌락은 약해지고 공허함과 함께 다시 권태가 찾아온다. 낯선 곳을 여행하는 것도 권태를 잊게 한다. 그러나 이 여행은 낯선 모험이므로 쾌락이 아니라 약간의 불편함이 동반된다. 불편함은 감각을 새롭게 깨어나게 한다. 편한 의자에 앉아 있을 때는 의자 자체를 의식하지 못했지만, 불편한 의자에 앉아 있을 때는 자꾸 의자를 의식하고 감각하게 되는 것과 같다. 처음 만나는 길과 낯선 사람들, 익숙치 않은 문화와 입에 잘 맞지 않는 음식. 낯선 것을 만날수록 익숙하게 접했던 기존의 것들이 새롭게 인식되기 시작한다. 새로운 길을 만나면서 기존의 길이 보이고, 낯선 사람과 만나면서 친한 사람들을 새롭게 생각하게 되며, 낯선 음식을 먹으면서 일상의 먹거리를 떠올릴 것이다. 이것이 기존의 것들에 대한 그리움이나 고마움을 유발하는 효과가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효과는 기존의 삶을 객관화하는데 있다. 타자라는 거울을 통해 자기의 모습을 비추어 볼 때 정위적으로 감각했던 자기와 그 주위의 모든 것들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한다. 불편한 새 의자를 통해 예전의 의자를 새롭게 인식하는 것처럼 말이다. 객관화는 대상과의 거리를 떨어뜨리는 일이다. 따라서 자기를 객관화한다는 것은 자기로부터 한 걸음 멀어진다는 뜻이다. 또한 이것은 기존의 자기 안에 있던 권태로부터 멀어진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뜻밖에 여정'을 통해 권태로부터 멀어질 수 있다. 물론...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손자병법에서는 “전쟁에서 승리한 방법은 다시 쓸 수 없으며, 형세에 상응하여 끊임없이 변화시켜야 한다.”(손자, 손영달 풀어읽음 『(낭송) 손자병법』 54쪽)다고 말한다.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적군을 예기치 못한 상황에 처하게 해야 한다. 적군이 아군의 전략을 예측하면 이기기 힘들다. 그래서 한 번 썼던 전략은 금방 들통이 나므로 다시 쓸 수가 없다. 또한 형세에 따라 변화를 주어 적군의 예측이 어긋나도록 해야 한다. 이런 법칙을 권태의 상황에 적용해볼 수 있다. 권태는 예측 가능한 일상이 반복되는 상황에서 발생한다. 따라서 권태를 제압하기 위해서는 늘 새로운 전략과 형세에 따른 변화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자기를 객관화는 과정 또한 늘 새롭게 일어나야 한다. 어쩌면 매일 낯선 곳을 찾아 헤매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에게 그런 여행은 특별한 이벤트일 뿐 일상적인 일은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여행을 떠나지 않고도 낯설게 체험할 수 있는 사유의 모험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선 낯선 감각으로 ‘자기’와 ‘세상’을 바라보아야 한다. 예를 들어, 너무나 당연하게 지켜야 했던 스위트 홈에 대한 열망이 나와 가족의 생명력을 억압시키고 권태를 유발하지는 않은지. 또 화폐의 증식이 상처와 번뇌를 덜어주고 삶을 충만하게 할 거라는 믿음이 혹시 망상인 것은 아닌지. 이렇듯 너무나 당연하게 느껴져서 감각할 수조차 없었던 삶의 욕망과 방향성을 낯설게 감각하는 순간, 이 권태가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곧 바로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 사유의 모험이 일상에서 이루어진다면 우리는 매일 낯선 장소에 가지 않고도 자기를 객관화하고 기존의 감각으로부터 한 걸음 멀어질 수 있고, 또한 익숙한 쾌락에 중독되지 않고 권태를 다스릴 수 있는 힘이 생길 것이다.



방제에서는 권태감과 피로감에 주로 보기약을 쓴다. 기가 쇠약해져서 권태감을 느낀다고 본 것이다. 대표적인 보기제는 사군자탕이지만 여기선 보중익기탕(補中益氣湯)을 주목해보자. 보중익기탕은 황기, 자감초, 인삼, 당귀, 진피, 승마, 시호, 백출로 구성되어 있다. 이 방제는 이름 그대로 중기(中氣)를 보하여 기를 보강한다. 중기가 부족하면 중심이 무너지면서 기가 밑으로 꺼지게 된다. 이를 중기하함(中氣下陷)이라 하는데, 양의학적으로는 탈항, 자궁하수, 횡격막허니아 등의 증상으로 나타난다. 또한 보통의 기허(氣虛)증과는 달리 발열과 식은땀(自汗), 가슴 답답증(心煩) 등 약한 감기와 비슷한 증상이 동반되는 기허에 쓴다는 것이 보중익기탕의 특징이다. 중기가 하함되면 기운이 올라오지 못해 권태와 피로가 생긴다. 전체적으로 기를 보충하는 역할은 황기, 인삼, 자감초, 백출 등이 하지만, 여기서 밑으로 빠진 기를 끌어올리는 주약은 승마와 시호다. 주의할 점은 보중익기탕을 쓸 때 승마와 시호의 양을 많이 넣지 않는다는 것이다. 기를 올리는 시호와 승마의 약효는 충분한 보기약의 기초 위에서만 제대로 발휘를 하기 때문이다. 특히 시호는 대표적인 목기(木氣) 약제로 울체된 기를 풀어주며 답답한 마음을 시원하게 해소시킨다. 즉, 길을 막고 있던 울체된 기를 풀어서 새로운 길을 내는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권태가 지속되면 기운이 빠지고 또한 감정도 울체되어 피로한 증상에 마음이 답답한 신경쇠약 같은 병증이 동반되기도 한다. 보중익기탕은 기를 북돋는 동시에 기허열을 제거하고 약간의 기울을 해소시켜, 약간 예민하면서 권태감을 호소하는 기허 환자에게 잘 쓰는 방제다. 시호는 새로운 길을 내어 준다는 점에서 낯선 체험이라 할 수 있다. 이 체험을 통해 권태는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여행 온 듯, 시원한 기분?!



슈렉은 자신에게 걸린 마법을 풀 수 있는 방법을 알아냈다. 피오나의 사랑이 담긴 키스를 받으면 모든 걸 다시 되돌릴 수 있다. 그러나 그게 쉽지 않았다. 피오나는 악당에 맞서는 저항군의 우두머리였고, 슈렉을 알지도 못했다. 그렇지만 모두의 예상대로 슈렉은 하루가 끝나기 전 극적으로 피오나의 키스를 받고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 슈렉은 현재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게 되면서 영화는 해피엔딩의 막을 내린다.
 

하지만 의문이 생긴다. 슈렉은 다시 권태에 빠지지 않을 수 있을까? 단 하루였지만 매우 험난한 경험을 했기 때문에, 또한 그런 경험을 통해서 기존의 일상을 새롭게 보았으므로 한동안은 권태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더 이상 새로운 모험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머지않아 비슷한 권태에 다시 빠질 수밖에 없다. 그것이 슈렉과 우리의 운명일지도 모른다. 끝없이 찾아드는 권태와 거기서 탈출하려는 생명의 시도들. 안락의 유혹은 권태를 낳고, 권태에서 벗어나려 하면 중독에 빠지기 쉽다. 그 사이에서 선뜻 낯설고 불편한 사유 혹은 체험을 선택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많은 선인들이 살아가는 것을 수양에 비유했는지 모른다.
 

글_도담(안도균)


낭송 손자병법 / 오자병법 (큰글자본) - 10점
고미숙 기획, 손무.오기 지음, 손영달 옮김/북드라망
팡세 - 10점
B. 파스칼 지음, 이환 옮김/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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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옥이낭자 2015.11.17 13:07 신고 답글 | 수정/삭제 | ADDR

    엥? 이건 수요일 연재글이 아니던가요? 혼자 요일 따져보고 당황했어요 ^^;;

    • 북드라망 2015.11.17 13:16 신고 수정/삭제

      지난 연재부터 화요일로 옮겨왔습니다. 이제 매주 수요일은 <고전분투기>!인 관계로:D

    • 옥이낭자 2015.11.17 14:31 신고 수정/삭제

      아하 그렇군요 ㅋ제가 성격이 좀 그래요. ㅠㅠ 이해해주세요^^;;

    • 북드라망 2015.11.17 14:33 신고 수정/삭제

      궁금하시면 물어보실 수도 있죠^^

  • jean 2015.11.17 15:33 신고 답글 | 수정/삭제 | ADDR

    넘 재미있게 감사하며 다 읽고나니 도담샘이 쓰신 걸 알게되어 더 반가웠어요. 요즘 동시다발로 낯선일들을 벌려 뭐가 들어왔나 궁금랬는데... ㅎㅎ 우야건 권태를 쫒는 묘약인 걸로~~~^^ 간사요!

    • jean 2015.11.17 15:34 신고 수정/삭제

      감사요~^^;;

    • 북드라망 2015.11.17 15:36 신고 수정/삭제

      낯선 일들이 들어오면 권태를 느낄 새도 없지요.
      읽고 댓글 달아주셔서 저희도 감사합니다:D

  • 2015.11.25 09:12 신고 답글 | 수정/삭제 | ADDR

    위 글의 내용 중 "~너무나 당연하게 지켜야 했던 스위트 홈에 대한 열망~"이 혹시 음양을 향한 자연(인간)의 본성으로 볼 수는 없는지요.... 음양을 이루어 살기위한 자연적 열망이라하기엔 자본이 많이 지배하고 있지만 그것을 제외하고 생명적으로 보았을 때 혼자살거나 공동체에서 사는 것과 부부를 이루며 사는 것은 양생에 다른 영향을 주는지 좀 궁금합니다. 혹자는 싱글은 건강해질 수 없다는 말도 하던데 사주의 치우침처럼 혼자서 살아가는 것이 몸적인 음양의 치우침으로 인해 여자는 음기태과 양기부족으로 몸의 회복이 힘들다는 해석이 가능한지 궁금합니다 특히 남자보다는 여자에게 그러하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간혹 수녀님들의 자궁암같은 것은 이런 부분의 치우침에서 어느 정도 연유한다고 볼 수 있는지요
    새로운 길위에 서있을 때 권태와 중독의 되풀이를 끊어 낼 수 있다면 그것이 혼자 사는 몸(몸뚱이 자체, 물체....)의 입장에서도 가능할까요? 여자가 음이고 남자가 양이라면 음양이 만나 조화로운 태극을 이루는 것이 자연에 따르는 것이고 그렇지 못한다면 아픈게 어쩔 수 없고 그러면 스위트홈의 갈망은 본능적 선택이 아닐까 또 지루함의 바닥에는 결국 기혼이든 미혼이든 몸속 음양의 조화가 깨어진 틈에서 나오는 몸적 권태가 아닐까하는 어설픈 궁금증이 들어서요~~

    • 도담 2015.11.25 22:17 신고 수정/삭제

      아빠, 엄마, 자식이 만들어가는 조화로운 하모니에 인생을 걸지만 모두가 경험하듯이 가정은 그렇게 조화롭거나 화목하지 않습니다. 가족 구성원 각자가 추구하는 욕망의 벡터가 다 다르기 때문입다. 그래서 하모니를 추구하기 위해 가족 중에서 권력을 가진 사람이 자기의 욕망을 강요하기도 합니다. 이게 다 가족을 위한 거라고 하면서요. 당연히 갈등과 충돌이 일어나거나 때론 각자 다른 삶을 찾아 떠나기도 하지요. 이렇듯 가족의 욕망은 한 곳으로 수렴되지 않고 흩어지는 방향으로 흐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 하모니에 운명을 걸기도 합니다. 그럴수록 더욱 집착이 생깁니다.
      물론 권력을 가진 사람의 선동이 가족들에게 먹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것이 오히려 더 문제적입니다. 가족 구성원들은 한사람의 만든 질서에 동화되며 자기의 욕망을 맞추어 가는데, 그 과정에서 외부와의 배타적인 단절과 선악의 이분법이 생깁니다. 질서를 어지럽히는 모든 외부의 요소들은 악이 되고 제거돼야 할 대상이 되어버리고, 반대로 질서를 유지하는 모든 건 선의 이름으로 치장됩니다. 가족 구성원뿐만 아니라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가장 역시 속박되어버리는 이 견고한 질서는 눈과 귀를 막고 외부를 차단시킵니다. 이런 신체를 가진 사람이 다른 존재와 섞이기란 쉽지 않을 겁니다. 외부와 섞이지 못하는 것을 한의학에서는 기가 울결되었다고 합니다. 결국 스위트 홈에 대한 열망이 울결을 낳는 셈이 됩니다.
      자연의 본성 혹은 음양의 이치를 따른다는 건 길흉과 선악의 이분법을 넘어서는 데 있습니다. 음과 양이 교대하는 것처럼 길한 것과 흉한 것도 머무를 틈 없이 서로 교대하며 흘러갑니다. 스위트 홈에 대한 열망은 그 흐름을 차단합니다. 위에서 말한 대로 집착과 울결을 낳기 때문입니다. 그건 자연의 본성도 음양의 이치도 아닙니다. 다만 권태를 비롯한 병리를 생산해 낼 뿐입니다.
      그런 점에서 모든 개인은 외부와 유동적으로 접속하고 섞일 수 있는 싱글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인연의 결속과 분리가 강제로 제어될 수 없음을 알고, 어떤 접속에서도 부조화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과 그 부조화에서 자기를 발견하고 배움을 열수 있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접속의 과정에서 감정이 쌓이기도 합니다. 특히 여자들이 더 그렇습니다. 신체가 음적으로 수렴되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이런 적체가 질병이 되기도 합니다. 물론 남자도 예외가 될 수 없지요. 요즘은 남자에게도 화병이 많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병은 누구나 걸립니다. 병을 퇴치해야 할 것으로만 여기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오히려 병을 통해 더 큰 시야가 열리기도 합니다. 그때의 병은 배움과 수양의 입구가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