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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하고 인사하실래요 ▽/씨앗문장

젊은 날의 아버지를 안아주고 싶을 때

by 북드라망 2015. 11. 10.


“나는 젊은 날의 내 아버지가

때때로 내 가엾은 아들처럼 느껴진다”




부모와 자식은, 서로를 객관화해―쓰고 보니, 너무 대단한 말처럼 느껴진다, 그냥 한 발 떨어져서 제3자의 성인으로― 보기가 쉽지 않다. 자식에게 부모는 날 때부터 어른이었고, 유년시절까지는 하지 못할 일이 없으며 내 생명이 거기 달려 있는 절대적 존재였다. 부모에게 자식은, 나를 잊게 하는 유일한 존재다. 자식이 없는 나는 그 마음을 유추할 뿐이지만, 언젠가, 좋고 나쁜 의미의 ‘쿨’함을 타고난 듯한 선생님 한분이 하셨던 말씀으로, ‘나를 잊게 하는 자식’을 실감되게 상상할 수 있었다. 그 선생님은 자기 영역과 타인의 영역이 너무나 분명하여 부담없는 깔끔함이 좋기도 하고, 또 가끔은 정없다 느껴지기도 하는 양반이었는데, 언젠가, 자식은 정말 다른 존재다, 라는 식의 이야기 끝에 만약 내가 죽어서 아들이 살 수 있다면 기꺼이 죽을 수 있다, 그런 존재는 내 생애에 자식뿐이다, 라는 이야기를 하셨다.




아무튼 그러나 자식에게 부모는 언제나 ‘부모’였던지라, 한 독립된 개인으로서의 부모를 생각하기란 쉽지 않다. 그냥 부모는 ‘부모’인 것이다. 나의 경우 마흔이 가까워서야 겨우 20대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마음을 떠올릴 수 있게 되었다. 가령 선을 보고 얼마 되지 않아 결혼한 뒤 작은 집안에 노인 두분(나의 조부모님)하고만 있는 것이 너무 싫어서 도망치고 싶었던 스물너덧 살의 엄마나, 나이 차 많은 늦둥이로 태어났다 졸지에 가장이 되어 노부모 봉양을 위해 진학이 아닌 입사를 선택했으나 젊은 자존심에 대졸자와 차이나는 대우를 받을 때마다 발끈하여 회사를 옮기곤 했던, 역시 스물두셋의 아버지의 마음이 느껴진달까. 얼마나 갑갑하고, 얼마나 좌절하며 분노했을까…. 그 시절의 엄마와 아빠를 떠올리면, 지금 엄마와 아버지를 볼 때와는 다른 애잔함이 밀려온다.


아, 젊은 내 아버지는 망해버린 조국에 대한 그리움에 흐느끼면서도 조국이라는 사슬에 얽매여 칭칭 감기는 운명을 저주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남긴 이 문장을 읽으면서, 나는 가엾은 내 아들과 같은 젊은 아버지를 안아주고 싶었다.

김훈, 『라면을 끓이며』, 문학동네, 2015, 36쪽


“젊은 날의 내 아버지가 때때로 내 가엾은 아들처럼 느껴진다”는 문장을 읽는 순간, 내가 젊은 엄마와 아버지를 떠올릴 때 들었던 안타까움과 애잔함이 내 속의 어딘가 저 밑바닥으로부터 울컥 솟아나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면서 어쩐지 그 어린 새댁과 좌절한 청년을 안아주면서 ‘괜찮아, 괜찮아’ 토닥여 주고 싶어졌다. 이 어려움도 다 지나간다고,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게 된다고, 말해 주고 싶었다.


젊은 날의 부모를 자식처럼 안아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는 것은, 삶이 어떤 것인지―마음처럼 계획처럼 되지 않고, 언제든 미끄러질 수 있지만, 또 자기가 스스로를 포기하지 않으면 어떻게든 길은 열리고, 그럭저럭 살아가게 된다는― 이제 조금 실감하며 알아가게 되었다는 뜻일 수 있을까. 아니면 나의 ‘부모’로만이 아니라, 한 ‘사람’으로 부모님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는 걸까. 모르겠다. 어떻든, 지금 칠순의 노인인 어머니와 아버지의 얼굴에 새댁과 청년의 얼굴이 겹치게 된 후부터, 나는, 한평생을 주어진 조건에서 때로 좌절하고 때로 기뻐하며 성실히 살아온 한 ‘인간’에 대한 존경이 부모님에게 솟아난다. 


물론 여전히 나는, 부모님과의 대화중에 때때로 짜증을 분출하고, 안아드리기는커녕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기도 멋쩍어 도리어 툴툴대고 만다. 하지만 ‘사람’으로 70여 년을 살아온 그 삶을 사랑한다.


라면을 끓이며 - 10점
김훈 지음/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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