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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그때 그 시집

기형도 시집 『입 속의 검은 잎』

by 북드라망 2015. 10. 20.


“우리는 모두가 위대한 혼자였다”

― 영원한 이십대의 망명지,

   기형도의 『입 속의 검은 잎』





나는 인생을 증오한다

― 「장밋빛 인생」 中


우리는 모두가 위대한 혼자였다. 살아 있으라, 누구든 살아 있으라.

― 「비가 2 : 붉은 달」 中



십대 때는 마흔이 넘은 나를 상상하지 못한다. 당연하다. 생각해 보면 자신이 뭔가 상상할 수 있는 미래의 내 모습은 길어야 10년 뒤쯤인 듯하다. 아무튼 십대 때는 마흔도 너무 오래 산 나이처럼 느껴진다. 노인의 모습을 한 뒤에 죽지 말고, 젊었을 때 죽었으면 좋겠다는 (철없는) 생각도 곧잘 한다. 십대 후반의 나는 이십대 길어야 삼십대 초반에 죽은 문인 및 예술가들을 동경하며 서른이 넘어 사는 삶은 끔찍할 거라 생각했다. 스물여덟에 죽은 윤동주, 스물일곱에 죽은 이상은 너무 아름답고, 고귀하며, 안타까워 보이지만, 일흔의 노인으로 죽는 윤동주와 이상은 상상조차 끔찍하게 느껴졌다(이것도 내력이라면 내력인지, 십대의 철없는 내가 이런 생각을 얼핏 내비쳤을 때 詩라고는 한 편도 제대로 읽은 적 없는 나의 모친께서도 어렸을 땐 서른에는 죽어야지,라고 생각했었다고 한다;;; 울 어머니는 물론 여전히 건재하시다)


왼쪽부터 윤동주, 이상, 에곤 실레, 커트 코베인. 모두 서른을 넘기지 못했다.


이십대가 되면 서른은 어느 정도 상상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짐 모리슨이나 커트 코베인처럼 스물일곱쯤에 죽는 일은 머릿속에서 지우게 된다. 다행이다. 아무튼, 이십대는, 역시, 모든 것이 불안정한 시기다. 앞으로 내가 무슨 일을 할 수 있을지는 물론이고, 오늘 내가 한 생각은 어제와는 정반대이기도 하고, 오늘 아무 관심없던 이성이 내일은 연인으로 바뀌기도 하며, 평생 사랑할 것 같던 연인과 한 달 뒤에 헤어지기도 하는, 나도 내 마음을 모르며, 내가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르는 시기인 것이다. 


그런 한편으로 이십대는 또 ‘자기 연민’의 시기이다. 자기 속에 흠뻑 빠져 나만이 외롭고, 나만이 불행하고, 나만이 세상에 다시 없을 사랑과 이별을 하고, 나만이 올바른 생각을 하고, 나만이 …… 아무튼 뭐든 ‘나만’ 그런 것 같은 시기인 것이다.


사람들하고 한없이 부대끼고 싶다가도 또 한없이 내면으로 침잠해 들어가는 그 시기에, 만으로 서른이 되기 전 갑자기 예상치 못한 죽음을 맞이한 기형도의 시집(『입 속의 검은 잎』, 문학과지성사)은, 뭐랄까, 세상으로부터 망명하는 곳 같은 것이었다. 그 시집에 가득 깔려 있는 방황과 상처와 불안과 그것이 자아내는 비극적 아름다움의 풍경은 곧 망명지의 풍경이다. 




나무의자 밑에는 버려진 책들이 가득하였다

은백양의 숲은 깊고 아름다웠지만

그곳에서는 나뭇잎조차 무기로 사용되었다

그 아름다운 숲에 이르면 청년들은 각오한 듯

눈을 감고 지나갔다, 돌층계 위에서

나는 플라톤을 읽었다, 그때마다 총성이 울렸다

목련철이 오면 친구들은 감옥과 군대로 흩어졌고

시를 쓰던 후배는 자신이 기관원이라고 털어놓았다

존경하는 교수가 있었으나 그분은 원체 말이 없었다

몇 번의 겨울이 지나자 나는 외톨이가 되었다

그리고 졸업이었다, 대학을 떠나기가 두려웠다


― 「대학 시절」 全文



기형도의 그때와 이유는 조금 다를지 몰라도 지금 이십대 역시 대학을 떠나기 두려우리라. 그리고 아마도, 내게도 그랬지만, 모든 이십대의 자전시 같은 시가 있다.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 「질투는 나의 힘」 全文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로 시작하는 「빈 집」과 더불어 읽을 때마다 속으로 읽는데도 한자 한자 힘주어 읽게 되곤 했던 이 시가, 하도 읽어도 절로 외워져 머릿속에 들어 있던 이 시가, 지금은 여느 시처럼 읽힌다. 이십대를 통과한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스스로를 잘 다독이고 제대로 사랑할 수 있는 시간대에 진입하게 된 게 아닐까. 나는 이미, 나보다 열두 해 먼저 태어났던 기형도보다 열네 해를 더 살았으니까. 나뿐 아니라 앞으로도 그를 사랑하고, 그의 시집에서 망명했던 모든 이십대들은 그보다 더 살아서 언젠가 아득해진 옅은 그리움으로, 혹은 엷은 미소 띤 얼굴로 그의 시들을 읽게 될 것이다. 오늘, 내게는 그의 시보다 소설가 김훈 선생이 그를 기린 추도문이 더 가슴을 후빈다. 


형도야, 네가 나보다 먼저 가서 내 선배가 되었구나. 하기야 먼저 가고 나중 가는 것이 무슨 큰 대수랴. 기왕지사 그렇게 되었으니 뒤돌아보지 말고 가거라. 너의 관을 붙들고 "이놈아 거긴 왜 들어가 있니. 빨리 나오라니깐" 하고 울부짖던 너의 모친의 울음도, 그리고 너의 빈소에서 집단 최면식의 싸움판을 벌인 너의 동료 시쟁이들의 슬픔도 아랑곳하지 않고 가거라. 그리고 다시는 생사(生死)를 거듭하지 말아라. 인간으로도 축생으로도 다시는 삶을 받지 말아라. 썩어서 공(空)이 되거라. 네가 간 그곳은 어떠냐…… 누런 해가 돋고 흰 달이 뜨더냐.



그는 어디로 갔을까

너희 흘러가버린 기쁨이여

한때 내 육체를 사용했던 이별들이여

찾지 말라, 나는 곧 무너질 것들만 그리워했다

이제 해가 지고 길 위의 기억은 흐려졌으니

공중엔 희고 둥그런 자국만 뚜렷하다

물들은 소리없이 흐르다 굳고

어디선가 굶주린 구름들은 몰려왔다

나무들은 그리고 황폐한 내부를 숨기기 위해

크고 넓은 이파리들을 가득 피워냈다

나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돌아갈 수조차 없이

이제는 너무 멀리 떠내려온 이 길

구름들은 길을 터주지 않으면 곧 사라진다

눈을 감아도 보인다


어둠 속에서 중얼거린다

나를 찾지 말라…… 무책임한 탄식들이여

길 위에서 일생을 그르치고 있는 희망이여


―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 全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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