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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하고 인사하실래요 ▽/씨앗문장

어릴 적'에는' 책 읽기를 참 좋아했지요

by 북드라망 2015. 8. 12.


관한 최초의 기억?



중학교 시절의 추억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당시 근처에 있던 포병 공창(군수품을 제조하고 수리하는 공장)을 둘러싼 벽돌담이다. 나는 매일 그 길을 따라 학교에 다녔다. … 집을 나서서 에도 강을 따라 이다바시의 다릿목까지 가서, 거기서 전찻길을 따라 왼쪽으로 꺾어져서 한참 가다 보면 왼쪽에 포병 공창의 붉고 긴 벽돌담이 나온다.
그 담장은 끝없이 이어지는데 … 그 길을 오갈 때 늘 책을 읽으며 걸었다. 히구치 이치요, 구니키다 돗포, 나쓰메 소세키, 투르게네프도 그 길에서 읽었다. 형 책, 누나 책, 내가 산 책을 가리지 않고 이해하거나 말거나 닥치는 대로 읽었다.

구로사와 아키라, 『자서전 비슷한 것』, 모비딕, 2014. 86-88p


출판사 직원이라고 하면 왠지 어릴 적'부터' 책 읽기를 당연히 좋아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나도  “저도 그렇습니다.”라고 속 시원하게 말하고 싶지만… 역시 지금은 그렇게 말하기가 좀 쑥스럽다. 심정적으로 가장 가까운 말은 “저는 어릴 적'에는' 책 읽기를 참 좋아했습니다.”이다.


어, 어릴적에는 참 좋아했지요.



책에 대한 최초의 기억은 7-8살 때쯤이었던 것 같다. 그때는 친척들이 많이 살았던 동네에 살았다. 근처에 살았던 친척 중에 막내고모가 있었는데, 고모는 나와 비슷한 연배의 딸이 둘 있었다. 한동안 자주 고모네에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놀러 가서는 사촌네 책상 밑에 들어가 꽂혀있는 책을 꺼내 읽곤 했다.  당시 우리 집에는 아버지의 소설책들밖에 없었고, 그 책들은 한자가 너무 많아서 나는 읽을 수 없었다.(생각해보면 아버지도 읽지 않았다!) 그런데 사촌네에서 내가 찾아낸 그 책들은 빳빳하고 컬러풀한 책들이었다. 읽을 수 있는, 재미있는 책의 맛을 그때 처음 알았던 것 같다. 그때 읽은 게 무슨 책이었는지 기억나는 게 하나도 없지만, 책을 읽으며 느꼈던 기쁨 같은 것은 아직도 기억이 난다. 이 기억이 해피엔딩으로 끝나면 좋으련만, 그렇지 않았다. 어느 날부터 내가 자기네 책을 읽고 있으면 사촌들이 귀신같이 나타나서는 다른 거 하고 놀자고 졸라대거나, 나중에는 책을 뺏거나 해서 읽지 못하게 했다. 결국 난 그 집에도 놀러 가지 않게 되었다.


저 부분을 읽으며 나도 어릴 적, 길을 걸으며 책을 읽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도로를 지나고 작은 골목길에 들어서야 읽기 시작할 수 있었지만 말이다. 구로사와 감독과 달리 나는 재미있는 책을 읽고 있었고, 다음에 어떻게 될지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던 마음 같은 것도 기억이 난다. 저 시절에는 나도 구로사와 감독처럼 읽을 수만 있으면 뭐든지 읽었다. 물론 이야기가 있는 책을 더 좋아했지만, 읽을 수 있는 책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뻐했었다. 하지만 요즘은 어릴 때처럼 마냥 책 읽기가 즐겁지가 않았다. 한동안은 책을 읽다보면 딴생각이 너무 많이 나서 읽어도 읽는 게 아니었고 그보다 최근에는 책을 읽으면 뭘 남겨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책을 읽는 게 재미있지 않았다. 피곤하다는 핑계로 간편하게 게임이나 tv같은 것들에서만 즐거움을 얻고 있었다. 책 읽기는 더 이상 즐거운 일이 아니게 되었달까.



저 때보다 나이가 좀 더 들면서 책을 두 종류로 나누었던 것 같다. 교양이나 정보와 같이 목적이 있는 책이나 단지 즐거움만을 위한 책들. 목적을 두고 책을 읽다보니 책 읽기로 얻는 즐거움이 뭔지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런데 친구에게 이 책을 추천받아 읽기 시작해서는 거의 단숨에 읽어냈다. 정말 기분이 좋았다. 담백하게 마음을 울리는 글을 읽는 건 기분 좋은 일이었다. 또 열심히 산 사람의 이야기를 읽는 것 역시 기분 좋은 일이었다. 목적이나 사심 없이 책을 읽고 뿌듯함을 느낀 것이 참 오랜만이었다.(분량도 딱 적당했다;;)  그래, 책을 읽는 게 이렇게 기쁜 일이었구나-를 새삼 떠올렸다. 왠지 "저는 어릴적'부터' 책 읽기를 참 좋아했어요." 라는 말을 다시 찾은 기분이었달까.




책 밑을 제법 접어서 뚱뚱해졌다ㅎㅎ



그렇지만, 지금의 나는 그냥 읽고 “좋았다-”라고 끝내기에는 부족하다. 좋은 책을 읽고 즐거웠으니 욕심을 내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건 욕심이라고 말하기 적당하지 않은데 다른 단어가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래서 좋은 부분의 모서리를 접으며 읽다가 아차했던 부분, 그리고 요 씨앗문장 때문에 찾아 다시 읽다가 뜨끔했던 부분을 마지막으로 덧붙인다. 다음이 이번 하반기부터 슬슬 시작해서 다음해 1년 목표가 될 예정이다.


노트하는 습관

누가 말했는지는 잊었지만 “창작은 기억”이라는 말이 있다. 내가 겪었던 경험과 읽었던 많은 것들이 내 기억 속에 새겨져, 무언가 새로운 것을 창조할 때면 그것들이 바탕이 되어 준다. 무로부터는 아무것도 창조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청년 시절부터 책을 읽을 때 항상 옆에 노트를 끼고 있다. 거기에는 내 느낌과, 특히 나를 감동시키는 구절들을 적는다. 이런 대학 노트가 몇 묶음이나 있는데,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할 때 나는 그것들을 꺼내 읽는다. 그 노트들은 언제나 내게 돌파구를 마련해준다. 심지어 한 줄의 대사조차도 이 노트들에서 힌트를 얻는다.

- 같은 책, 350-351쪽


구로사와 아키라 자서전 비슷한 것 - 10점
구로사와 아키라 지음, 김경남 옮김/모비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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