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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방제와 병법

집착의 울열을 저격하라! - 대승기탕

by 북드라망 2015. 6. 24.


은밀하게 위열 끄기 혹은 사랑의 열병 다루기

- 대승기탕(大承氣湯)



전쟁의 일은 적의 의도를 상세히 파악하여, 은밀히 적을 뒤따르다가, 한 방향으로 몰아가 천 리 바깥의 적장을 살해하는데, 이것이 교묘하게 일을 이룬다는 말이다.

손무, 『손자병법』, <리링 『유일한 규칙』, 임태홍 옮김, 글항아리, 405쪽>에서 재인용


‘이미테이션 게임’은 이차대전 당시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다. 주인공인 수학자 앨런 튜닝은 연합군의 기밀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된다. 프로젝트의 목적은 ‘이니그마’라는 독일 암호 체계를 해독하기 위해서다. 내로라하는 천재들이 모여 암호를 해독하지만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고군분투 끝에 결국 앨런은 이니그마를 해독할 수 있는 기계를 만들게 된다. 기계가 완성되자마자 해독한 첫 암호는 몇 분 후 독일의 유보트가 수 백 명의 민간인을 태운 배를 침몰시킬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팀원들은 이 사실을 당장 보고해서 유보트를 격추시키자고 했지만 튜닝은 이를 말렸다. 수송선이 갑자기 항로를 바꾸고 공중 폭격 중대가 기적처럼 유보트의 정확한 좌표로 폭격을 시작하면 독일군이 뭐라고 생각하겠냐는 것이다. 독일군은 ‘이니그마’의 암호 시스템을 연합군이 알아냈다고 눈치를 챌 것이고, 암호 체계를 바꿀 것이다. 그러면 2년 동안의 노력이 물거품이 된다. 튜닝은 말한다. “우리의 임무는 한 척의 수송선을 구하는 게 아니라 이 전쟁을 끝내는 거야.” 그들은 독일군이 눈치 채지 않을 정도의 최소한의 군사행동을 수학적으로 계산했다. 그러면서도 전쟁에서는 최종적인 승리를 얻어야 했다. 영화에서는 스탈린그라드 전투, 아르덴 전투, 노르망디 상륙작전 등 중요한 전투에서 연합군이 승리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 그런 개입의 결과라고 말한다.


이처럼 적의 의도를 안다는 것은 매우 유리한 입장에 있지만, 그 의도를 아군이 알고 있다는 것을 적이 알면 안 된다. 그래서 적의 의도를 파악할수록 은밀해야 한다. 적의 의중을 꿰고 있으니 적이 가고자 하는 대로 놔두는 것이 상책이다. 적의 방향을 알고 있는데 굳이 초장부터 격돌할 필요가 없다. 어디로 향하는지 알고 있다면 천 리 떨어진 곳이라도 상관없다. 숨어 있다가 갑자기 나타나 공격하면 적은 한 번에 무너질 것이다. 특히 적장을 먼저 없앤다면 적군은 크게 동요할 것이고, ‘형세(形勢)’는 이미 아군 쪽으로 기울게 된 것이나 다음 없다.




태양병은 외감(감기 등)의 초기에 시작되는 병이다. 발열과 오한, 몸살 등 심한 감기증상 같은 전염성 질병이 일어나는 외감 초기의 병을 태양병이라 한다. 태양병에 쓰는 약 중의 중요한 방제가 마황탕이다. 마황탕은 외부에 머물러 있는 사기를 땀으로 배출시킨다. 땀은 일종의 기운이다. 기운을 내보내면서 표면으로 침입한 사기를 몰아내는 것이다. 그러나 치료가 적절하지 못하거나 병사가 빠르고 강하면 태양병은 전변(轉變)되어 안으로 들어간다. 안으로 파고든 병은 이제 더 이상 태양병이라고 하지 않는다. 오한은 멈추었지만 열이 안으로 들어가 내장(위)에 침투한 이런 병을 양명병(陽明病)이라 한다. 양명병은 양명경증(陽明經證)과 양명부증(陽明府證),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그 중에서 위열로 인해 매일 일정한 시간에 열이 오르고(조열), 식은땀이 나며(자한), 가슴이 답답하면서 갈증(번갈)이 나는 증상과 함께 대변이 통하지 않는 증상을 ‘양명부증’이라고 부른다.  


이때는 병사에 대항하는 방법을 달리한다. 태양병일 때는 병사(病邪)를 밖으로 내모는 것으로 병을 치료했지만 양명부증에서 그런 치법을 쓰면 안 된다. 너무 안쪽으로 들어간 탓에 그런 치법을 썼다간 부작용만 심해질 뿐이다. 이때는 병사가 들어가는 안쪽 방향을 주목해야 한다. 이 병증의 최종 목적지는 위(胃)다. 위장에 열을 일으켜 대장에 굳은 똥을 만드는 것이 이 병증의 특징이다. 이 위열로 인해 조열, 자한, 번갈 증상과 함께 대변이 통하지 않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이런 증상들을 살피면 병이 위장으로 들어갈 것이며 특히 그 열을 대변에 집중시킬 것이라는 정보를 취득할 수 있다.


이제 적의 의도를 알았으니 은밀해져야 한다. 내장에 몰린 병사(여기선 열사(熱邪)가 된다)에 대항하기 위해서 정면으로 맞설 수도 있지만 그보다 더 교묘한 방법이 있다. 열사의 핵심 부분을 집중 공략하는 것이다. 열사의 핵심이란 바로 조시(燥屎), 즉 ‘굳은 똥’을 말한다. 열사가 집중된 유형(有形)의 실체. 그것은 ‘양명부증’의 요체가 되므로 손자가 말한 적장에 해당된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조시가 머물고 있는 곳은 몸에서 가장 깊은 곳 대장의 끝 부위다. 그러나 동시에 이곳은 음이 극에 이르러 양이 되듯, 가장 바깥과 연접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소화관이란 해부학적으로도 외부로 뚫려 있는 공간이다. 입으로부터 항문까지 연결된 공간. 이곳은 몸 안이면서 몸 밖이다. 소화관의 세포 역시 피부와 같은 상피세포로 되어 있다. 이곳을 지나서 배출되는 대변은 엄밀하게 말하면 단 한 번도 몸 속 구경을 못해본 찌꺼기다. 그런 점에서 대장 안의 공간은 몸에서 깊은 장소지만 바깥과 매우 가까운 곳, 혹은 이미 바깥인 것이다. 마치 건물의 가장 깊숙한 지하 공간에 외부로 통하는 비밀 통로가 있듯이 말이다. 열사의 실체인 조시가 밖으로 통하는 통로에 있다. 정확하게 말하면 대변에 열사가 집중되어 여기서부터 열사가 온 몸으로 공급되고 있다. 이때 쓸 수 있는 가장 좋은 방책은 이 굳은 똥을 내보내는 일이다. 적장을 제거하여 적군의 물리치는 것처럼 은밀하게 조시를 제거해서 열사를 없애면 될 것이다.


"은밀하게 제거하는 거다냥"



이때 사용하는 방제가 ‘대승기탕’이다. 대승기탕은 지실, 후박, 망초, 대황으로 구성된다. 이 약들을 각각 비(痞), 만(滿), 조(燥), 실(實)이라는 증상을 해결한다. 비와 만은 명치 부위가 단단하고 막힌 것 같으면서 배가 팽창되는 느낌을 동반한 증상이다. 이는 기운이 울체되어 막혀 있기 때문이다. 지실과 후박은 복부에 맺힌 기운의 울체를 풀어서 아래로 내린다. 조와 실은 쉽게 말해 단단한 대변을 의미한다. 안으로 들어간 열사 때문에 대변이 말라 굳어진 것이다. 이때 망초와 대황은 대변을 통하게 하여 열을 끈다. 요컨대 대승기탕은 “위부를 통하게 하여 열을 내보내고, 뭉친 것을 부수어 배가 그득한 것을 꺼뜨리며, 급히 설사시켜서 열을 빼냄으로써 진액(津液)을 보존한다.”(『상한론』)


사랑과 집착의 열병도 태양병과 양명병의 전변과도 같은 과정을 겪는다. 사랑의 마음이 싹트는 연애 초기는 감기 초기에 앓는 태양병, 즉 오한, 발열, 몸살처럼 강렬하다. 하루 종일 상대의 생각이 나고, 생각이 나면 심장이 강렬하게 뛴다. 또한 “두 사람 사이에 있던 장벽이 갑자기 무너져버리는 경험”(에릭 프롬, 『사랑의 기술』, 황문수 옮김, 문예출판사, 77쪽)을 하게 되는데, 이는 내가 상대와 하나가 된 듯한 몸적 체험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나보다는 상대가 하고 싶은 것을 원하고 상대의 뜻에 나의 뜻을 맞추고 싶어 한다. 그러므로 상대의 뜻을 따르는 것은 곧 나의 뜻이기도 한 것이다. 그건 억지스런 일이 아니다. 이러한 강렬한 체험이 따르기 때문에 사랑을 흔히 ‘열병’이라는 말로 표현하는 것일 게다. 


하지만 이런 사랑의 열병은 말 그대로 병이다. 그 증상은 이렇다. 우선 상대가 세상 어떤 사람보다 예쁘고 멋있어 보인다(망상). 심장이 두근거리고(심계), 자주 성욕이 치민다(음화치성). 그리고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를, 밑도 끝도 없는 잡다한 얘기들을 늘어놓는다(섬어). 사랑의 열병은 감기처럼 왔다간다. 물론 감기만큼 짧은 기간은 아니지만 곧 사라져야 할 증상들이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관계가 끊기고, 심장에 병이 생기며, 신장의 정(精)이 고갈되고, 심하면 정신적인 문제까지 이어질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병증을 없애고 원만한 일상과 몸으로 돌아가기 위해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그 열을 점점 식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랑의 강렬함이 식어가는 것은 매우 생리적이고 자연스런 현상이다. 


이건 사랑이 변하는 게 아니에요~



그러나 대부분 그 과정은 무난하게 연착륙되지 않는다. 사랑의 열병은 집착의 열병으로 전변된다. 감기 정도로 끝나야 할 태양병이 깊숙한 곳에 내열을 일으키는 양명병으로 진행되는 것처럼 말이다.(물론 태양병이 양명병으로 전변되는 것은 흔하지 않다) 상대가 되는 체험은 상대의 뜻을 따르려는 마음을 동반한다. 그러나 이 체험은 정반대로 상대를 내 맘대로 하고 싶은 욕망을 낳기도 한다. 즉, 상대의 뜻이 나의 뜻이라면, 내 뜻대로 하는 것이 곧 상대의 뜻이라고 해석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상대의 뜻에 맞추는 일이 당연했던 것처럼 상대도 내 뜻을 따라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나의 뜻이 상대의 뜻과 어긋날 때가 생긴다. 그럴 때 내 뜻이 통하지 않으면 상대에 대한 원망과 집착이 시작된다. 특히 어느 한 사람이 먼저 사랑의 열증이 식기라도 하면 그 집착은 몸 깊숙한 곳에 울열(鬱熱)을 만든다.


집착으로 인한 울열은 대장 안으로 숨어든 조시(燥屎) 혹은 아군 진영에 숨어든 적장과 같다. 이 울열이 억울함, 분노, 슬픔 등을 동반하면서 비대해진 자아의 신체로는 도저히 감당해 낼 수 없는 복병이 된다. 그러나 이 복병 혹은 적장은 사랑의 시작과 더불어 어떤 방향으로 가게 될지 짐작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렇게 까다로운 상대가 아니다. 사랑이 시작되는 순간, 상대가 되고픈 나의 변신 의지 안에 이미 비대한 자아가 잠복된다. 이것이 나중에 집착의 씨앗이 될 거라는 사실을 눈치 챘다면 이제 은밀하게 접근해야 할 때가 되었다. 적의 방향을 알았으니 은밀하게 지켜볼 일이 남은 셈이다. 만일 잠복된 적을 미리 무서워해서, 사랑의 열병을 냉소와 거리두기로 초반에 저지한다면 어떤 사랑도 할 수가 없다. 우리는 이미 언제 어떻게 복병이 일어날지를 알고 있다. 전략상 매우 유리한 위치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 몸에 들어온 타자가 기존의 자아로 대체되는 그 때, 즉 상대가 내 꺼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을 노리고 있어야 한다. 그런 마음이 들 때 재빨리 집착의 씨앗을 제거하면 될 것이다. 조시가 더 강한 열로 몸의 진액을 다 말리기 전에 대승기탕으로 조시를 설사시켜버리듯이 말이다. 그러면 사랑을 지속할 수 있으면서도 집착의 열병으로 전변되지 않을 수 있다. 또한 사랑이 집착으로 변신하는 과정을 고스란히 지켜보면서 어떻게 사랑을 해야 집착과 고통으로 빠지지 않는지를 배울 수도 있다. 파라켈수스가 말 한 것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자는 아무것도 사랑하지 못한다.” 사랑도 배워야 한다.


글_도담(안도균)




유일한 규칙 - 10점
리링, 임태홍/글항아리
사랑의 기술 - 10점
에리히 프롬 지음, 황문수 옮김/문예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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