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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하고 인사하실래요 ▽/씨앗문장

어제 〈냉장고를 부탁해〉 보셨습니까?

by 북드라망 2015. 5. 12.



자신만의 길을 간다는 것





시와 문장을 쓸 때 다른 사람들을 쫓아 견해를 세우는 경우가 있고, 자신만의 견해를 세우는 경우가 있다. 다른 사람들을 쫓아 견해를 세우는 경우는 비루해서 말할 것이 없다. 그렇지만 자신만의 견해를 세우는 경우에도 고집을 앞세우지 않고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아야 ‘참된 견해’[眞見]가 될 수 있다. 또 반드시 ‘참된 재주’[眞才]로 그 견해를 보완한 이후에야 시와 문장에 성취가 있게 된다.

내가 수년 동안 그런 이를 찾다가, 마침내 송목관(松穆館) 주인 이우상(李虞裳) 군을 만나게 되었다. 이군은 시와 문장에 있어서 뭇 사람들을 뛰어넘는 식견을 갖췄으며, 따라잡을 수 없는 사유의 경지에 있었다. 먹을 금처럼 아꼈고, 시구(詩句) 하나하나 단전을 수련하듯 다듬었다. 그리하여 붓을 한 번 휘두르자 전할 만한 글이 되었다. 그러나 세상이 알아주지를 구하지 않았으니, 세상에 알아줄 만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기를 구하지 않았으니, 자신보다 나은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내게 자신의 글을 보여주고는, 도로 상자에 감춰 두었다.

- 이용휴·이덕무·박제가 지음, 길진숙·오창희 풀어 읽음, 『낭송 18세기 소품문』 북드라망, 2015, 111-112쪽



요새 제가 가장 재미있게 보고 있는 tv 프로그램은 JTBC의 <냉장고를 부탁해>입니다. 자타가 공인하는 한국의 탑 셰프들(^^;;)이 게스트로 나오는 2명의 연예인의 냉장고에서 재료를 골라 15분 만에 음식을 만들어 솜씨를 겨루는 경연(?) 프로그램이지요. 게스트의 냉장고를 직접 스튜디오로 가져와서 방송을 진행하는데, 게스트별로 냉장고 속이 천차만별입니다. 양희은 아줌마네나 소유진네(라고 쓰지만 ‘백주부네’라고 읽는)처럼 재료가 넘치는 냉장고가 있는가 하면 온통 인스턴트뿐인 냉장고도 있습니다. 그런 악조건(?)에 15분이라는 시간제한까지 있어서 요리가 완성되는 과정이 완전 흥미진진하지요.





요리사가 시간과 재료의 제한을 두고 훌륭한 요리를 만들어 내는 것이 이 프로그램의 가장 큰 재미라고 생각하는데요(물론 남의 냉장고를 몽땅 뒤져보는 것도 재미이긴 합니다만^^;;) 위 글을 보는 순간 <냉장고를 부탁해>에 나오는 요리사 중 한 사람이 생각났습니다. 바로 최현석이지요. 평소에 요리 프로그램을 즐겨 보는지라, 최현석은 그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이 양반 참 재미나다’라고 생각한 것은 <냉장고를 부탁해>에서였습니다. 알 만한 분들은 다 아시겠지만 최현석은 요즘 가장 핫한 요리사입니다. 요리 실력보다 더 유명한 것은 그의 ‘허세’입니다. 그는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과장된 동작으로 요리를 합니다. 팔을 높이 쳐들고 재료에 소금을 친다거나 앞치마를 펄럭이며 맨다거나…(요리를 할 때는 멋있게 해야 한다던가요? 물론 웃기려는 거겠지만^^;). 말로도 폼을 잡습니다. 방송 중에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요리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냅니다. 현란한 칼질 후에 “멋있으면 박수쳐도 돼요”라고 한다거나 “내 요리가 맛이 없었던 적은 없었다”, “개발한 레시피가 1000개가 넘는다” 같은 말로요. 그의 말이 웃음을 유발하는 이유는 거기에 털끝만큼도 ‘겸손’이 없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보통은 아무리 사실이라고 해도 그걸 자기 입으로 말하지 않지요. 소설가가 이렇게 말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제가 아무래도 소설을 좀 잘 쓰긴 합니다. 그러니까 내는 소설마다 베스트셀러가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소금을 칠때 굳이 이런 포즈를 취할 필요가..;;;



보통 저런 식으로 말하면 거만하다고 여겨지거나 비웃음을 삽니다. 좋을 것이 없지요.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은 최현석이 저런 식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 이유는 저런 말이나 행동 후에 따라붙는 쑥스러운 웃음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의 말이 틀린 게 없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보통 TV에 나오는 다른 유명한 셰프처럼 외국 유학 경력이 없습니다. 오로지 국내에서 갈고 닦은 실력만으로 유명 레스토랑의 총괄 셰프가 되었고, 여러 학교에서 요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가 하는 요리가 한식이 아니라 양식(정확히는 이탈리아 요리라고 하더군요)이라는 걸 생각해 보면 참 대단하지 않습니까?


아! 벼슬이 높아져 일품의 자리에 오르더라도 갑자기 아침에 거두어 가면 저녁에는 평민이 되고 만다. 재물을 벌어 만금을 쌓았다 해도 갑자기 저녁에 잃어버리면 다음날 아침에는 가난뱅이가 되고 만다. 그러나 뛰어난 문사가 소유한 재능은 한 번 얻은 뒤에는 조물주라 하더라도 어찌할 수 없다. 이것이야말로 ‘참된 소유’[眞有]이기 때문이다. 이군은 이미 문사의 재능을 소유했으니 그 나머지 구구한 일쯤이야 가슴 속에 남겨두지 않는 것이 좋으리라.

- 같은 책, 112쪽


양식 요리사들이 한국에서 성공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유학입니다. 실제로 tv에 나오는 대부분의 요리사들에게는 유학 경험이 있지요(한식 요리사를 제외하고요). 양식 요리사가 되려는 사람이 외국 유학을 다녀오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죠. 그렇지만 유학 경력이 방송에서 홍보되면서 과장되고 부풀려지는 일이 있기도 합니다. 그런 문제로 사라진 요리사들이 종종 있지요. 그렇지만 최현석은 그런 허위 경력 추문에 휩싸여 방송계에서 사라지는 일은 없을 겁니다(팬심!!). 모두 국내 경력이기도 하고, 요리업계에서 소문이 난 다음에 방송에 나온 경우라서 딱히 경력이 과장될 일도 없으니까요. 그래서 ‘참된 소유[眞有]’를 보며 최현석 생각이 들었나 봅니다. 다른 사람들이 가지 않은 길을 갔으니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노력하고 갈고 닦아 지금에 이르렀을까요. 저 사람이 괜히 대단한 것이 아니구나 싶었던 거죠. 최현석의 요리를 보면서 고기 굽는 법에 대해서 배운 저로서는 이 재미난 요리사가 tv에 좀더 오래 나와서 더 다양한 요리를 더 많이 보여 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씨앗문장인'척'하는 팬심 포스팅 같아 좀 쑥스럽네요. 이렇게 썼다고 제가 외식 업계에 일가견이 있고 그런 것은 아닙니다. 전 그저 그들의 기예에 가까운 ‘작업’을 보는 것을 좋아할 뿐이에요.^^)

낭송 18세기 소품문 - 10점
이용휴 외 지음, 길진숙 외 옮김, 고미숙/북드라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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